[Opinion] 천사들은 모르는 '인간'이라는 시 [영화]

글 입력 2022.07.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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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라가면, 저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는 뻥 뚫린 서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언덕 큰 바위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져 있다. 교과서에도 수록된 유명한 시. 수백 번을 읽었음에도, 유달리 한 구절이 낯설게 다가왔다.


별들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죽어가는 것들. 지구에 발 딛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는 ‘생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은 죽어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Wings of Desire, 1987)> 주인공인 천사 다미엘은 인간처럼 죽음의 강에 빠지고 싶다고 말한다. 영원이 아닌 순간 속에 살고 싶다고 말한다.

 


화면 캡처 2022-07-21 160018.png


 

"영원의 시간 속에 떠다니느니, 나의 중요함을 느끼고 싶어. 내 무게를 느끼고 ‘현재’를 느끼고 싶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이란 말을 하고 싶어."

 


유한한 시간 속에 사는 것은 과연 특권일까?

 

그는 영원에 살면서, 보고 모으고 증언하고 지키는 것을 반복하는 천사의 일상에 싫증을 느낀다. 영화에 등장하는 ‘천사’가 하는 일이라고는 꽁지머리를 한 채 코트를 입고, 사람들의 어깨나 머리에 손을 대는 일이 전부니까. 실제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천사의 삶은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료 천사인 카시엘은 다미엘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라며,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미엘은 인간을 향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의 표정은 인간처럼 다양한 감정이 묻어나고, 아이의 행동을 따라 하며, 죽음을 마주한 인간의 마음도 진정시켜본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천사 다미엘 욕망의 중심에는 인간 마리온이 있다.


서커스 공중곡예사 '마리온'은 영화 내내 존재론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무인도에 살고 싶었던 그녀는 쓸쓸해지고 싶었고, 쓸쓸해져 봤고, 홀로 된 ‘인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마리온은 이제 막 인간이 된 다미엘을 인도하기 위해 그의 곁에 다가선다. (아래 그림: 왼쪽 마리온, 오른쪽 다미엘)

 

피가 흐르는 육체를 느끼기 시작한 다미엘은, 다른 천사들은 모르는 '인간'이라는 시를 이해하게 된다.

 

 

화면 캡처 2022-07-21 155625.png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채로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한다면, 초반에는 영화를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다. 오프닝부터 나오는 많은 인물이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내레이션만으로 생각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코트를 입은 낯선 모습의 천사들이 도서관,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 곁에 머물기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만의 방식과 법칙으로 이야기를 서서히 전개해 나간다.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가 가닥이 잡히고 그들이 움직이는 방식과 이 영화만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관객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한다.

 

이는 미술 전시회를 관람하는 기분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아직은 낯선 작품들에 대해 경계를 하며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하지만 전시의 흐름과 법칙을 이해한 순간부터는 작품을 온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감상하게 된다. 사람마다 관람하는 방식이 달라,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시간이 다르듯 말이다.

 

전시를 관람하다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아픈 다리의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과 맞는 좋은 작품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들여다보기도 한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온몸으로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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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의 천사의 시>의 장면들은 마치 물결처럼 흐른다. 씬별로 나누어 굳이 분석하고 싶지도 않다. 천천히 흐르는 대사의 향연을 음미하다가도, 인과관계가 없는 단어들의 나열을 계속 듣다보면 영화밖으로 생각이 흩어진다. 그러나 영화의 흐름을 다시 따라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영화의 메세지가 비교적 명료하기 때문이다. "인간 예찬"

 

물론 ‘인간을 향한 무한 긍정’이라는 메세지가 너무 명확해, 갈등해결의 서사나 주인공 고난 극복 플롯의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 천사 다미엘은 인간이 너무나도 쉽게 되고 (갈등이 없다), 영화가 묘사하는 '천사'의 삶이란 것도 딱히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삶을 엿보고 싶은 관객의 판타지를 영화는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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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따지거나 생각하지 말고 몸의 직관을 사용하여 감상해야 한다. 마치 전시회에서 온몸으로 미술작품 감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에서는 보통 사용하지 않는 감각을 사용하게끔 하는 점이, 이 영화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영화를 온전히 감상하는 데 누군가는 몇 분이, 누군가는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며칠이 걸렸다. 아니 솔직히, 몇 년이 지나도 다시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니까 오롯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내 방 한켠에 걸어놓고 싶은 그런 영화였으니까.

 

 

[민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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