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거대한 연극’, 읽는 도중 자연스레 떠오른 이 문장을 잊고 싶지 않아서, 딸려온 책자 귀퉁이에 적어놓았는데 작가의 말에 똑같은 말이 등장해서 놀랐다. 다들 이런 생각하고 사나? 삶은 어쩌면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너무 촘촘하고 면밀하게 설계되어 들춰보지 못할 뿐 현실이라고 이름 붙여진 연극일 수도 있다고. 막은 자주 내리기도 하고 끝내 내리지 않기도 한다. 여러 커튼콜의 순간이 존재하기도 하고 커튼콜이 내리는 장면에 본인이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자는 삶의 과정에서 존재하고 후자는 죽음 이후에 존재한다.
위수정의 신작 소설 ‘fin’에서는 4명의 심리 상태를 저술한다. 배우인 ‘기옥’과 ‘태인’, 이들의 매니저이기에 배우가 아닌 ‘윤주’와 ‘상호’가 그 인물이다. 이제는 막이 내린 연극에서 상대 배우로서 호흡을 보여준 기옥과 태인은 뒷풀이 장소에서도 소란의 주인공이 된다. 기옥은 술에 취하면 선을 조절하지 못하는 태인의 모습에 타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반감을 느끼는 반면, 극이 전개될수록 이들이 꽤 닮아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윤주는 기옥에게 열패감에서 비롯한 미움을 느끼는 동시에 본능적인 보호 본능을 발현한다. 외적으로도 재정 상황으로도 반대인 두 사람도 어딘가 닮아있다. 그리고 이런 기옥과 윤주의 관계는 태인과 상호의 관계에도 빗대어 볼 수 있다. 이들은 끝내 서로의 본질과 본심을 파악하고 구분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구분이 과연 옳은지, 쓸모 있는지는 또 누가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적에 다양한 기준을 떠올린다. 그 기준은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람이 쌓아온 시간과 경험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으며 법으로 명확하게 명시되어있지도 않다. 결국 한 사람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이란 아무리 객관적이려 노력해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 보통 무엇을 통해 판단하곤 하는가, 대게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단 몇 번의 행동으로만 한 사람이 규정되지는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 내보이는 모든 행동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이미지는 쉽게 변하고 잊히고 뇌리에 박힌다. 10번 착한 행동을 해도 1번의 나쁜 행동이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사람의 본질로 귀결된다. 본질적으로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니 한 사람의 행동은 곧 그 사람 자체가 된다.
그럼 본심은 본질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인지 궁금증이 인다. 이런 흥미로운 연관성을 돋구게 한데에는 다음 문장들이 있다.
“나는 가난한 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건 그냥 상태일 뿐이야. 상태. 본질은 아니라고.” 108p
“상호는 그런 태인을 보며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본질과 본심은 다른건가요?’” 116p
상호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와 술에 취했을 내뱉는 말의 정도와 형태가 다른 태인을 보며 궁금해한다. 과연 어느 쪽이 태인의 본심이자 본질일지. 술에 취하면 낮은 욕설을 뱉는 태인의 모습을 진짜 태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소에 상호 본인의 연기에 진지하게 칭찬의 말을 해주는 태인의 모습에 감동해 ‘태인이 말한 본질을 만난 느낌이었다’(111p)고 이르기도 한다. 본질과 본심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애초에 명확히 결정되어 있기는 한 걸까.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 있다. 그 반대 또한 가능하다. 결국 좋고 나쁜 사람이란 (그 외에도 다양한 특징이 있겠지만 편의를 위해 이 두 가지로만 예를 든다.) 마주하는 사람에 따라 달린다. 사람은 좋게 보려면 좋게 볼 수 있고 나쁘게 보려면 무슨 행동을 해도 나쁘게 보인다. 필요에 따라 똑같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수도,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본질과 본심은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정의하는 입장에서는 본심이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고 본질이 본심으로 나오니까. 상호는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태인에 대해 끊임없는 의아함을 품지만, 본인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태인의 본질을 어느 정도는 착한 쪽으로, 태인의 부인인 혜림을 떠올리면서는 태인의 본질을 어느 정도 나쁜 쪽으로 기울이는 듯하다. 상호 본인에게 있어서 생각해버리기 쉬운 쪽으로.
책을 다 읽어낸 지금도 본질에서 본심이 나오는 건지 본심이 모여 본질을 만드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이 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소설에서 살펴볼 수 있는 건, 삶을 살아내는 모두 대게는 정확한 본질에 근거하여 완벽한 본심을 드러내며 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들 적당히 둘러대고 적당히 밝히며 산다. 완전히 거짓인 삶은 없으며 완전히 진실인 삶 또한 없다. 충분히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결코 연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섞여 우리는 더욱 입체적인 역할을 가진다.
삶을 연극으로 생각하고 배우로서 임하는 중이라고 여겨보는 건 꽤 거북할 수도 있지만, 이렇다할 결말이 없는 극이라고 생각하면 캐릭터는 주체성을 가질 수도 있다. 혹여나 주어진 역할이라도 본인 하기에 따라 극의 전개가 달려있다는 소리다. 어느 순간에서는 일부로 틀리게 대사를 뱉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 또한 본인의 몫이다. 이렇듯 연극 무대에서는 무수한 돌발 상황의 가능성이 있다. 나로 인해서든 상대 배우로 인해서든 관객에 의해서든 어떤 요인에 의해서든. 그리고 이는 진짜 삶이라 칭할 수 있는 현실에서도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연극과 삶은 비슷한 경계에 맞닿아 있으며 나는 나로 살면서 나를 연기한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연기하면서 나로 살아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연기하면서 비로소 나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기도 하니 말이다.
“나의 본심과 가장 먼 것들이 어쩌면 나의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말과 행동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40p
어떤 때에는 연기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가장 진실한 내 모습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창조되는 나’는 내 속 내밀한 모습을 완전히 바꿔버리기도 한다. 어떤 척을 자꾸만 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처럼 꺼내지는 말과 행동은 나라는 사람을 정의 내리는 데 중요하고 때로는 본질과 본심에 영향을 미친다. 어차피 ‘나’는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모든 사람의 생각 속에서 일관된 나를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나도 그냥 나 좋을 대로 나로 살아가도 나쁘지 않다. 본질이나 본심이야 어찌 됐든 나는 내 연극 속에서 언제나 주인공일 것이니. 그리고 세상에는 저마다의 수많은 연극이 존재할 것이니.
다만, 모든 것은 남의 연극에 피해되지 않는 선에서, 서로 예의를 지켜가면서 전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