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사람의 눈은 유난히 반짝인다. 영화 초반에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리아의 얼굴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눈동자였다. 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그 눈동자를 짓밟은 자들, 그리고 그렇게 빗발치는 셔터 앞에 우두커니 남겨져야 했던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의 이야기다.
그 눈동자를 부수기 전까지
마리아는 성공한 남성 영화배우의 혼외자로, 1960년대 프랑스의 홍길동처럼 자랐다. 아버지는 그녀를 자식으로 내세우지 않지만, 어린 마리아에게 그가 일하는 영화 현장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세계다. 16살의 마리아는 아버지를 따라 영화 현장을 드나들며 배우의 꿈을 키웠고, 19살의 마리아는 드디어 배우로서 본격적인 박차를 가할 기회를 마주한다. 당대 톱스타 말론 브란도와 연출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것이다.
첫 촬영에서 카메라를 향해 단단하고 당당하게 마주 걷는 마리아의 모습에는, 꿈꾸던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반짝임이 느껴진다. 이 영화의 실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반짝임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알기에 마음이 고통스럽다. 영화는 큰 움직임 없이 담담히 그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을 끝까지 직시하는 나의 감정은 내내 불편하고 혼란스러웠다.
영화는 인물의 얼굴을 집요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응시한다. 타이트하게 잡힌 클로즈업 속에서 마리아의 눈빛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처음 등장할 때의 눈동자에는 순수한 열정이 고여 있다. 믿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의 눈이다. 베르톨루치와 말론 브란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재능이 드디어 세상에 인정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카메라 앞에 서는 그 순간에도 그녀의 눈은 분명히 빛난다. 나는 그 눈을 보고 나서야 영화가 단순히 폭력의 실화를 재연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영화가 애도하고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짓밟아버린 어떠한 '가능성의 눈빛'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도 그녀는 완전히 고요한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인물이 아니다. 클럽을 전전하고, 술과 약에 기대고, 가벼운 관계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트라우마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역설적으로 그 트라우마와 닮은 공간이나 상황에 스스로를 반복해서 밀어 넣는 경우가 있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마리아의 행동도 그 연장선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낯선 사람들로 붐비는 클럽, 몸과 몸이 부딪히는 소음, 쉽게 맺고 쉽게 사라지는 관계들. 그곳은 분명 그녀가 피해를 입었던 촬영장의 공기와는 다른 장소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닮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위험과 쾌락, 폭력과 감각이 뒤섞인 환경 속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인다. 그것이 자해에 가까운 반복인지,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둔감화인지, 아니면 그 둘이 동시에 뒤엉킨 상태인지 당사자가 아닌 나는 감히 단정할 수 없다.
"누가 마리아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 질문 끝에는 언제나 다른 얼굴들이 있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나의 이름은 마리아'임에도 어떤 순간에는 마리아보다 그녀를 둘러싼 비겁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영화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남자 주인공 말론 브란도는 마치 좋은 파트너처럼 등장한다. 그들은 예의 바르고, 다정해 보이고, 때로는 마리아의 안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불편한 씬을 앞두고 상대 배우를 배려하는 프로페셔널한 동료 배우 혹은 배우의 역량을 한층 더 성장시키고자 하는 능력 있는 감독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서서히 그들의 연출된 배려를 벗겨낼수록, 그 친절함이 얼마나 험악한 가면이었는지 드러난다. 스태프들이 가득한 현장, 카메라의 프레임 안팎에서 마리아는 순식간에 '배우'에서 '대상'으로 밀려난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은 영화와 연출가의 예술성이라는 명분 아래 그저 수단으로 전락한다.
가장 죄 없는 방패
더 불편한 부분은 그 이후다. 영화가 개봉한 뒤, 영화계는 물론 대중들 사이에서도 큰 파장이 일었다. 수많은 셔터가 빗발치고 비판과 논란이 쏟아지는 지점에서 책임져야 했던 사람들은 재빠르게 숨어버린다. 작품의 예술성과 문제적 장면은 끝없이 논쟁거리와 가십거리로 소비되지만, 정작 그 프레임 안에서 타의적으로 몸을 드러내야만 했던 한 사람의 삶은 방치된다. 마리아는 온갖 질문과 공격, 질타와 욕망을 셔터 앞에서 온몸으로 맞는다. 그녀는 피해자이자 생존자이지만, 동시에 그 비겁함을 대신 맞아야 했던 가장 죄 없는 방패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도 떠오른 질문은 단순했다.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녀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런 행동을 한 마리아보다도, 그녀가 그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던 구조가 무엇이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가해자들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폭력을 행사한 유명세있는 배우와 연출, 현장에서 침묵한 스태프들, 그리고 사건 이후 자극과 논란을 추구하며 가장 취약한 사람을 쫓아다닌 언론. 마리아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이들의 비겁함이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마리아 슈나이더
개인의 선택은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다. 특히 트라우마는 삶 전반의 질서를 교란하고 왜곡시키는 경험이다. 극심한 충격 이후 사람은 때로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삶을 밀어 넣는다. 반복적인 위험 추구, 과도한 자극, 자기 파괴와 자기 보존의 모순된 충동이 뒤섞이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트라우마 연구에서 흔히 관찰되는 양상들이다. 마리아 역시 그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일탈과 중독은 비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폭력 이후에도 계속 작동하는 심리적 후폭풍의 증상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마리아의 행동을 판단하거나 함부로 이해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책임의 방향과 그 이후 남겨진 공백을 누가 메웠는가에 있다. 그 공백을 오랫동안 감당해야 했던 것은 결국 마리아 본인과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연인이었다.
영화는 끝끝내 살아남은 한 사람의 눈동자를 비춘다. 트라우마와 중독에 시달리는 그 눈동자에서도 여전히 내가 처음에 보았던 반짝임의 잔상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여전히 꿈을 꾸지만,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는 빛날 수 없는 눈. 그것을 기억하는 일이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마리아 슈나이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