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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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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영화 <시라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시라트'는 처음보는 낯선 단어였다. 시라트는 이슬람 개념에서 나온 용어로, 사후 세계에서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인 길을 뜻한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판단의 통로이며 매우 가늘고, 미끄럽고,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추락한다고 전해진다. 길 위의 목적보다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관람한 후, 그 어느 때보다 제목이 내포한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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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positive) 사운드 디자인


 

영화 <시라트>의 첫 장면은 시각보다 청각을 먼저 사로잡는다.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광란의 파티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들고,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이 시퀀스에서 관객은 사운드 디자인의 심상치 않음을 어렵지 않게 캐치할 수 있다.


영화 관람은 서울 잠실에 위치한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의 광음 시네마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체험한 사운드는 단순히 “크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베이스가 쿵쿵 박자를 찍으면, 공기를 타고 귀뿐만 아니라 몸으로 들어오고, 몸 속에서 진동한다. 영화 <시라트>의 몰입은 감정 이입 이전에 신체 반응으로 시작된다. 스토리를 마주하기도 전에, 이미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와 버린다.


이 감각은 단순히 “사운드가 좋았다” 정도로 정리되지 않는다. 사막에서 전개되는 로드무비 특성상, 자동차가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스피커가 그르릉거리며 울릴 때, 자동차 엔진이 의자 밑에서 둥둥거릴 때, 나를 포함한 극장 안의 관객들은 어느새 사막 위의 동행자, 동승자가 된다. 감각을 넘어선 체험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체험 때문에 영화가 준비해 놓은 충격적인 전개에 속절없이 빠져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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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라는 맥거핀


 

초반부는 사실 일반적인 로드무비의 출발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사막을 헤매는 아버지 ‘루이스’와 어린 아들 ‘에스테반’. 전단지를 들고 사람들을 비집고 다니며 파티장을 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익숙한 미스터리 추적 로드무비의 시작과 같다. 물론 사운드의 임팩트는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익숙함을 보란듯이 배신한다.


영화 <시라트>의 흥미로운 지점은, 관객이 기대하는 서사를 철저히 이용한 뒤 버린다는 데 있다. 딸의 행방, 묘한 분위기의 동행자들과 그들의 정체, 다음 목적지 등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이 질문들을 따라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그 질문들에 답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외부의 폭력이 이들의 경로를 계속해서 바꾼다. 파티는 흩어지고, 길은 끊기고, 더 험한 사막과 산길로 밀려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단호해진다. 아들 에스테반과 반려견의 사고는 감정을 준비할 틈도 없이 도착한다. 이 장면이 충격적인 이유는 단순히 비극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죽음이 너무도 현실적인 속도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고와 죽음의 순간은 설명도, 강조도 없이, 그저 루이스와 관객들의 눈앞에 벌어져 버린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지만, 그 순간이 너무도 사실적이라 예측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충격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때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후의 이야기는 더 이상 딸을 찾는 여정도, 동행자들과의 대립과 화해 서사도 아니다. 상실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과 사막 위의 시라트, 그 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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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만 어긋나도 끝나는 길, 지뢰밭과 시라트


 

영화의 중후반부, 사막의 지뢰밭 시퀀스는 이 작품의 정점이다. 춤과 음악, 해방의 순간처럼 보이던 장면은 순식간에 죽음의 공간으로 뒤집힌다. 누군가는 한 발 한 발 옮기는 순간이 곧 죽음의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영화의 제목이 비로소 강렬히 작동한다.

 

‘시라트’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인 극도로 가늘고 미끄러운 길로, 모든 인간이 반드시 건너야 하지만 누구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통로이다. 지뢰밭을 건너는 이들의 모습은 그 정의와 다소 적나라하게 겹쳐진다. 광활한 사막 한복판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죽음이 바닥에 박혀 있다.


그 위를 건너는 방식은 놀랍게도 의지나 전략이 아니라 무념에 가깝다. 루이스는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바람 없이 걸었다.” 나는 화면 속에서 눈을 감고 저벅저벅 지뢰밭을 통과하는 자들을 보는 것이 이토록 괴로웠던 적이 없었다. 제발 건널 수 있기를, 제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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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비대칭


 

되돌아보면 이 영화의 비극은 개인의 선택 이전에 계속해서 전쟁으로 수렴된다. 파티의 해산도, 경로의 변경도, 그 바뀐 경로가 결국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도 전쟁 때문이다. 지뢰밭이 웬 사막 한 가운데에 박혀 있는 이유 또한 전쟁일 것이다. 전쟁은 인간을 자꾸만 극한의 상황, 비극적 결말로 내모는 거대한 원인으로 작동한다.


등장인물들 역시 저마다 비대칭적인 결핍을 안고 있다. 한쪽 팔, 한쪽 다리, 반쪽 머리카락. 신체적으로는 온전해보이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결과적으로 그 자들은 대신 마음의 일부가 날아가 버린 상태로 남는다. 영화는 이 잔혹한 교환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는 철길이 등장한다. 사실상 기차로 이동하거나 기차가 중요한 영화는 아닌데 왜 철길이 이렇게 등장할까 생각했다. 철길은 끝을 알려주지 않는다. 목적지가 없는 듯 길게 이어지는 두 선 위로 빠르게 이동하는 카메라는 이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음을 말한다. 모두가 지나가야만 했던 길, 시라트를 지나고 난 다음에도 끝나지 않는 삶의 관성과 남겨진 사람들과 전쟁의 끔찍한 지속성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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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여운


 

영화가 끝난 뒤 가장 많이 떠오른 말은 이것이었다.

 

“와, 이게 뭐지?”


다른 무엇보다 압도당한 감각이 있었다.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떡밥의 회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방금 통과해온 이 세계가 무엇이었는지를, 몸과 마음으로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 <시라트>는 이해시키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관객을 하나의 길 위에 세워 놓고, 끝까지 같이 걷게 만든다. 몰입을 넘어선 체험을 유도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잔혹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삶과 아주 가까이 닿아 있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추락하는 길 위에서,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만 보이는,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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