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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영화 <두 번째 계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는 대개 거창한 사건으로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은 설명되지 않은 채 지나가고, 어떤 이별은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시간 위에 그냥 묻혀버린다. 그래서 이따금씩 끝난 줄 알았던 관계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아직 나의 시간 위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영화 <두 번째 계절>은 바로 그런 순간을 포착하는 영화다. 15년 만의 재회라는 설정은 언뜻 영화적으로 보이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감정은 놀랄 만큼 일상적이다. 이미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을 때 느끼는 어색함, 익숙함,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의 잔여물을 영화는 극적인 언어로 포장하지 않고, 우리가 현실에서 흔히 사용하는 속도로 일상적인 감정의 결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실 어느정도 예측가능하다. 누군가 떠나고, 다시 만나고, 잠시 흔들리고, 결국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두번째 계절>의 특별한 점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미세한 진동을 현실과 아주 가깝게 끌어왔다는 것이다. 스테판 브리제 감독은 관계의 시작이나 끝보다도, 끝났다고 믿었던 관계가 왜 다시 반복되는지, 그 반복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동시에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마티유의 15년
영화의 중심에 있는 인물 ‘마티유’는 이미 성공한 영화배우다. 그럼에도 그는 연극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도전한다. 그러나 개막을 몇 주 앞둔 시점에서 돌연 하차한다. 영화는 이 선택의 구체적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인터뷰까지 진행된 이후의 하차라는 사실, 그리고 전화로 쏟아지는 동료의 비난을 통해 그 선택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선택을 포기하고 떠났다는 점에서 마티유는 분명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만큼의 부담과 압박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라는 짐작 또한 가능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인물을 세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냥 다 그만두고 튈까?' 하는 상상은 하기에, 쉽게 옹호할 수도, 단정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게 만든다.
마티유가 휴양지로 향한 선택 역시 낭만적인 도피로 그려지지 않는다. 리조트에서의 시간은 쉼보다는 도피와 정지에 가깝다. 그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유명인으로서 타인의 시선을 받고, 사진 요청에 응해야 하며, 전화를 통해 현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지는 못한다. 이 장면들은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할 법한 풍경처럼 느껴진다. 커피 머신 하나를 다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참 안 풀리는 상황 때문인지 마티유라는 캐릭터는 보다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15년 만에 다시 만난 알리스와의 관계도 같은 결을 따른다. 이 재회는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라기보다,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이별을 완성하기 위한 시간에 가깝다. 두 사람은 과거에 연인이었고 그 관계는 제대로 끝맺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익숙함과 끌림, 애정과 원망이 동시에 작동한다. 대화는 잘 통하고, 서로의 취향과 기억을 공유하지만, 그 모든 것은 현재라기보다 과거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이들이 다시 가까워지는 이유는 지금의 서로를 새롭게 알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에 여전히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알리스의 15년
알리스의 입장에서 이 재회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마티유에게 이 만남이 도피이자 유예의 시간이라면, 알리스에게는 오래 미뤄두었던 감정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 가깝다. 그녀는 과거의 관계로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 여파로 우울증까지 겪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삶을 계속해서 살아왔고, 결혼도 하며 일상을 꾸려왔다. 다시 말해, 알리스는 이 관계를 마음속에 남겨둔 채로 담담히 현실을 살아낸 사람이다.
알리스는 마티유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끝내지 못한 것을 비로소 정리하기 위해 마티유 앞에 선다. 여전히 끌리는 감정이 남아 있음에도, 그 감정이 현재의 사랑이 아닌 과거의 잔여물이라는 사실을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온도 차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마티유가 여전히 선택을 미루고 머뭇거리는 동안, 알리스는 이 만남이 어떤 결말로 향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쪽에 가깝다.
알리스의 자작곡 청음 장면은 그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장면이다. 그녀는 한때 작곡을 하던 사람이었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아간다. 음악을 완전히 포기했다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축소된 형태로 나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녀가 마티유 앞에서 직접 작곡한 곡을 들려주는 씬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그녀의 곡을 관객들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제거된 사운드 속에서, 관객은 철저히 제3자로 남는다. 이 음악은 설명되지 않고, 공유되지도 않는다. 아마 전개된 시퀀스 어딘가에서 배경음악으로 존재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순간, 그 음악은 오직 알리스와 마티유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연주를 마친 뒤 마티유가 건네는 감상은 단순하다. “너무 좋다.” 그 말에 알리스는 눈물을 터뜨린다. 이 장면에서 그녀의 눈물은 사랑의 재점화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노래를 들려줄 사람과 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부재한 시간들에 대한 고백에 가깝다. 알리스는 상처를 안고도 삶을 지속해왔고, 가정을 꾸리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언어였던 음악과 꿈은 조용히 뒤로 밀려났다. 마티유와의 재회는 그래서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잠시 꺼내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는, 비로소 다시 맞이하는 두 번재 계절처럼 다가온다.
정지와 호흡
마티유와 알리스는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위로를 얻고, 다시 다투고, 결국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마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 반복은 극적인 서사라기보다, 현실에서 자주 목격되는 관계의 패턴에 가깝다. 그래서 이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서로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럼 보인다. 그 도피는 일시적인 위안을 주지만,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호흡 명상 씬은 이러한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강사는 마티유에게 정지와 호흡에 대해 말한다. 오는 길에 새 떼를 본다는 것이 참 귀하기에 잠시 멈추어 그들을 지켜보느라 늦었다는 말, 마티유는 숨은 쉬지만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다는 말을 건낸다. 마티유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 한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모두 담고 있는 장면이라 느껴진다. 새 떼는 계절마다 돌아오지만 계속해서 이동하는 존재이다. 마주하는 순간이 귀하기에 마주했을 때는 잠시 멈춰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새 떼는 다시 이동하고, 시간이 맞지 않으면 우연으로도 다시 만날 수 없다. 호흡을 할 때에는 들이마시고 내쉬어야한다. 받아들이고 내보내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계절>이라는 제목은 낭만적인 은유라기보다, 반복과 회귀의 감각으로 다가온다. 계절은 지나가지만 다시 돌아오고, 사람은 변한 듯 보이지만 결국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재회를 통해 미래를 선택하고 바꾼다기보다 이 관계가 더 이상 현재형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확인을 통해 비로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남았을 법한 후회와 원망을, 만남을 통해 소진하는 셈이다.
이 영화는 사랑이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관성과 삶의 호흡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과연 잘 호흡하고 있는가, 잠시 멈출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정말로 잘 마무리지었던가. 영화는 그 질문을 남긴 채, 이동하는 새 떼처럼 머물렀다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