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예술 관련 비문학 글을 읽게 된다. 예술이 일상에서 분리되어 예술을 위한 순수한 예술로 남아야 한다는 주장, 예술이 우리 삶에서 떨어져선 안 된다는 대립부터 예술의 대중화에 대한 각기 다른 비판과 옹호까지. 이러한 글들을 읽으며 내가 얻은 건, 솔직히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도 예술 사조나 예술 이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내가 말을 얹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죽었다』에서 무엇보다 쉽고 직관적으로 현대 예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제시해 준 덕에 예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확장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 박원재는 예술 기획자이자 작가, 그리고 칼럼니스트이다. 2018년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에서 두 명만이 받을 수 있는 발루아즈 상을 받 유일한 아시아 갤러리를 이끌기도 했다. 또한 미술 아카이브 플랫폼 '아티파이(Artify)'와 위치 기반 전시 정보 앱 '아트가이드(Artguide)'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째서 예술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은 왜 멀어졌는가?
1부에서는 예술의 죽음을 다룬다. 저자는 자본주의, 목표지향주의, 엘리트주의가 예술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약화하며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종교 미술의 상업화와 산업혁명, 대중문화의 발달까지 중세부터 현대 사회경제적 변동 양상을 지켜보면, 예술 작품이 금전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자 소비재로 전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을 구매하고 소장 가치가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되파는 리셀러들을 생각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예술과 종교의 역사를 비교하며 유추의 논증 방식을 활용해 예술의 어두운 현재이자 근미래를 그린다. 증명되지 않은 신앙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온다. 사람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신에게 의존하는 방향으로 세운다. 그러나 신을 독점하며 신을 정의하는 소수가 율법을 정하며 심판자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권력관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권위주의로의 흐름은 예술의 '아카데미'화와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예술의 가치를 소수가 판단하고, 그들에 의해 증명되지 않은 예술은 저평가되는 것이 현대 미술의 실태이다. 누군가 천박하다고 평가하는 자본주의마저 결국 소수 엘리트의 고고한 미학에 의존하여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는 예술이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이 아닌 '팔릴'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재산으로 여기게 하며 사회적 상상력과 창의성을 고갈시킨다. 더 나아가 다양성을 훼손하는 길로 이어지는 것이다.
본디 예술은 삶이었다
2부는 예술의 죽음, 그 이전의 생애에 대해 다룬다. 고대의 동굴 벽화부터 현대의 아방가르드 예술까지. 예술은 몸에서 시작되고 몸으로 끝나는 행위의 결정체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점점 몸이 아닌 머리로 살아가게 됐다. '접촉'으로 직접 세상을 맛보았던 과거와 달리 우리는 '접속'만으로 지구 반대편과 이어진다. 이는 생활의 편리함과 극도의 효율성을 보장하지만 빈곤한 경험을 만들어낸다. 감각이 소외된 매끄러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낯섦과 불편함을 점차 견딜 수 없는 몸이 된다. 낯섦의 다른 말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이자 비동일성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준다. 반면 AI는 가치가 증명된 것만을 시도한다. 아름다움, 낯섦부터 고통에 이르기까지 직접 얻은 감각에서 뽑아낸 고뇌와 숙고가 아니다. 이는 예술이 깊이를 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짜 감각을 주입한다.
저자는 예술이 너무나 다른 우리를 서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체로, 감각기관으로 서로를 느끼고 교감해야 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는 몸을 통한 교감이 어디까지 관객을 예술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공고히 한다. 오직 침묵과 눈 맞춤을 통해 관객은 그와 공명하고, 예술을 완성한다.
인간의 최종 목표는 독립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목표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우리는 삶의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에는 타인과 함께하며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예술 역시 그렇다. 예술이 감상자로부터 유리되어 창작자에서 비롯된 완전한 본질을 세상에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에 불과하다. 저자는 예술이 타인과 연결되는 소통의 장이라고 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일상으로 돌아온 예술
3부에서는 죽었던 예술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본다. 저자는 창작자와 감상자가 함께 예술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뒤샹의 말을 인용하며 강조한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소유가 아닌 경험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예술이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아닌 과정 그 자체가 되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작가가 일정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있으면 관객이 돌아가며 그녀와 마주 앉았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가 가능한 이 행위는 각기 다른 관객과 작가가 마주 봄으로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의 지평을 넓힌다.
작품은 소유의 대상이 아닌 공유의 시작점이다. 제프 쿤스가 자신의 작품을 '오브제'라고 부르는 것처럼, 작품은 작가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창작할 때의 감정과 세계, 주관적 경험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이는 감상자와의 소통 창구이기도 하면서 앎을 삶으로 넘겨주는 매개체로서 기능한다. 음악 스트리밍처럼 언젠가 미술도 소유가 아닌 반복과 경험을 통해 충분히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발적인 제목과 다르게 이 책은 예술의 재활성화, 부활의 가능성을 엿본다. 예술은 현재 새로운 길목 앞에 서 있다. 앞으로의 예술이 어떻게 변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