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책은 여러 편의 짧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짧은 산문들도 각각 하나의 완성된 글처럼 보이기보다는 여러 조각의 더 짧은 문장 덩어리들을 한 데 이어 붙인 듯하다. 전체적으로 조각보 같은 글이라는 감상이지만. 조각보라 하면 대체로 원색 위주의 다채로운 빛깔과 형태가 우선 떠오를 텐데 그렇지도 않고 비슷한 색의 비슷한 모양새라 만져보기 전에는 매끈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신 아주 정상으로 보여요.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기뻤다. 내가 정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제 나도 자기와 같다는 걸,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안도감이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가 말해도 될 때의 안도감. 그게 나에 관한 모든 이야기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터진 솔기를 찾는데, 나는 불쾌하지 않다. (p.493)

 

 

터진 솔기를 숨겨야 한다. 하지만 숨기는 것이 드러났을 때는 거짓말쟁이라 욕한다. 하지만 숨기지 않으면 서로를 불편하게 한다며 흉본다. 터진 솔기를, 아니 솔기 자체를 숨겨야 한다. 한 번도 뜯어진 적 없는 것처럼. 보통 누군가가 자신에 관한 무언가를 숨긴다면 그것은 본인을 보호하기 위함일 텐데, 어쩐지 정신병의 은폐는 반대로 상대를 보호하기 위함으로 느껴진다. 규정상으로는 폐지되었다지만 여전히 남아 있을 미군의 성소수자 복무 정책 같다. Don’t ask. Don’t tell.


멀지 않은 과거에 성소수자가 정말 정신질환자로 불렸던 걸 보면 비슷한 게 아니라 정말 같은 것일지도. DSM으로 불리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초기 버전에서 그들은 동성애를 정신 장애로 취급했다. 또 그전에는 흑인 노예가 도망치는 것을 배회증이라는 병명으로 진단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흑인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고 도주하는 것이 비정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바뀌면서도 항상 존재한다. 항상 바뀌기 ‘때문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겠다만. 마찬가지로 그들에 의해 비정상으로 분류 당한 저자는 정신 병원에 입원한다. 이 책은 그 회고록이자, 문학비평이다.

 


의미들_앞표지_띠지.jpg

 

 

산발적인 글들에 아니 에르노를 떠올리며 읽었다. 에르노 또한 조각보 같은 글, 특히나 그 뜯어진 솔기를 기찻길 삼아 따라다니는 글이다.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에르노의 작품이 그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고, 이 책에서도 저자의 어머니가 그 존재감을 강렬히 드러내는 탓도 있을 것이다. ‘부재’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게 새삼스럽다. 있다가 없어진 ‘부재’와 원래 없었던 ‘무’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고, 어떤 책의 해설에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부재에는 주인 없는 의자가 홀로 남아 있지만, 무에는 빈자리조차 없다. 저자는 그 빈 의자를 채워야 한다는 듯 탐독한다.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로 필요했던 이야기를 수집하고 빈자리를 메운다.

 


강사가 된 나는 문학과 삶의 가장 명백한 연결점들조차 찾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주 되새기게 된다. 아니 그보다는 좋은 독자, 좋은 학생이 그 연결을 인식할 수는 있더라도, 그 연결을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것을.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과 그 의미를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 또한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문학 분석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메소드 연기에 더 가깝다. 나에게 그 일은 감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힐턴 앨스가 표현했듯이, 내가 그걸 느낄 수 없다면 그걸 쓸 수도 없다. (p.206)
 

 

어떤 사람에게는 인상적인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에게도, 언젠가는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또 다른 언젠가는 그렇지 않게 된다. 저자는 메소드 연기라는 표현을 선택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배우가 아니라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아무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메소드 연기라 함은 노력과 의도로 시작하는 것일 텐데, 문학의 느낌은 자의와 무관하다.


대신 이것도 부재, 그러니까 빈 의자 때문이라고 보는데. 나에게 있는 빈 의자 하나가 네모난 궁둥이를 위한 의자라면, 동그란 궁둥이들이 아무리 쏟아져 들어와도 그 동그라미들은 다 튕겨 나갈 뿐이다. 하지만 네모난 궁둥이가 딱 하나만 들어올 수 있다면, 딱 그 네모 하나는 자석이라도 달린 듯 내 네모 모양의 빈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을 것이다.

 

 

joshua-hoehne-liwRPWAiQEQ-unsplash.jpg

 


신기하게도 네모 의자가 비었을 때는 어쩐지 네모 궁둥이 책만 찾아 읽게 된다.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집어 든 책도 펼쳐보면 네모 궁둥이다. 대단한 우연도 있지만, 확증 편향의 탓도 있다. 확증 편향은 내 본인의 기존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는 현상인데, 그것처럼 본인의 기존 빈자리를 채우는 이야기만 취사선택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낸다. 그 책 안에 아무리 다양한 궁둥이가 들어 있어도 내 눈에는 네모 궁둥이만 보인다. 이런 편향의 문제점은 항상, 스스로가 이런 취사 선택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 내 네모 의자가 비어 있고, 그래서 내가 네모 궁둥이만 광적으로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의 나는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들도 왜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조차 미지의 존재다.

이렇게 회상하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이야기의 요소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서사의 추진력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 그런 추진력을 더한다.

나는 아주 많은 걸 알았지만 그 앎을 이해하기에는 경험이 너무 적었다. (p.80)

 

 

이 미지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글쓰기다. 쓰고 나면 그건 내가 아니게 되고 지금이 아니게 되고 관찰할 수 있는 지난날의 무언가가 된다. 이 책도 그중 하나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조금은 더 늘어난 저자가 자신을 돌아본다. 그들에게 분류 당하지 않고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정의를 내리는 대신, 의미를 찾는다.

 

 

 

image.pn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