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피드백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시간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복잡하던 터라 작년 3분기까지 성실히 참여하던 모임을 가을부터 쉬었는데,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니까 상상 이상으로 글쓰기에 불성실해져서 올 초부터는 다시 모임에 나갔다.
사람이 바뀌어도 모임은 매번 비슷하게 흘러간다. 서로의 글을 하나씩 공유한다. 미리 읽어온다. 만나서 이야기한다. 어쩌다가 이런 글을 쓰게 되셨나요? 이 부분은 왜 이렇게 쓰신 거죠?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왜죠? 이렇게 보면 공격적이지만 온전히 궁금증에서 비롯한 순수한 질문이다. 반박하려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떤 대답에든 수긍하려고 묻는다. 나름 여러 번의 모임을 거치며 이 질의응답에 좀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이전 모임들에서는 질문에 맞춰 답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묻지도 않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먼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글에 이미 많은 이야기를 쑤셔 넣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이렇게나 많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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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던지고 받고 답을 던지고 받는 동안 왜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기억이 났다. 이전의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팀원 한 분이 ‘저는 글을 쓸 때 너무 괴롭고 힘든데, 다른 분들은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 신기하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나는, 글을 쓸 때 괴롭고 힘든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노동을 좋아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각자 선호하는 노동이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항상 그 ‘다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 노동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건 다 똑같지만, 글쓰기를 할 때 ‘내가 다시는 이걸 하나 봐라’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 대신 이런 생각을 한다. 다음에 쓸 때는 이런 이야기를 써야지, 다음에 쓸 때는 이렇게 써봐야지, 다음에 쓸 때는…
무언가의 다음을 꿈꾸거나 계획하거나 상상하거나 기다리는 것은 그걸 좋아한다는 가장 큰 증명이 아닐까. 사람 사이도 그렇다. 어쩐지 빈말로 전락해 버린 것 같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다음에 보자’라는 말을 들으면 역시나 기분이 좋다. 나 또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다음에 보자, 진짜로’라고 재차 강조하기도 하고.
다음과 비슷하되 다른 말로 ‘나중’이 있다. ‘다음에 봐’와 ‘나중에 봐’. 미묘한 차이이고 꼭 구분해서 쓰지도 않지만, 다음에 보자는 건 짧은 시일 내에 만남이 예정된 듯하고, 나중에 보자는 건 천운이 따랐을 때나 볼 생각이지 그게 아니면 영원히 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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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은 글쓰기에 소홀해지며 다음이 아니라 나중을 생각하고 있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글쓰기뿐만 아니라 그냥 인생의 모든 것이 나중으로 밀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이 예정된 모임이 있어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모임에서는 다음 글을 정하기도 했다. 총 네 번의 모임 중 마지막 두 번은 사전에 정한 공통 주제로 각자 글을 쓰고 만났다. 이전의 피드백 모임에서도 다음 글감은 무엇이냐 가볍게 의견을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이번 모임처럼 다음 글의 공통 주제를 지정한 적은 없었다.
공통 주제라고 뭐 거창한 건 아니다. 다들 글쓰기의 괴로움을 아는 터라 너무 좁은 주제를 고르면 그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빠질 뿐이라는 점까지 사전에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공통 주제를 정하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을 골랐다. 하나는 ‘싫어하는 것에 관해 쓰기’ 또 다른 하나는 ‘다른 팀원이 먼저 쓴 주제로 쓰기’
당연히 공통 주제의 존재 이유는 다 같은 소리를 하는 다 같은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의 기준을 두고 누가누가 잘 쓰나 백일장을 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하나의 주제로 얼마나 색다른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해서였다. 실제로 각자 글을 쓰고 만나보니, 공통 주제라는 점을 미리 밝히지 않으면 읽는 사람들은 이 글들이 같은 주제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다. 접근부터 다른 것도 재밌고, 접근은 비슷한데 방향이 전혀 다른 것도 신기했다.
네 번의 만남으로 올해 첫 모임을 마무리했다. 이제 당장 예정된 다음 모임도 다음 글도 없다. 그럼 나는 다음에 글을 쓸 것인가, 나중에 글을 쓸 것인가. 다음과 나중을 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관한 답을 내놓으며 이 글의 끝을 맺고 싶은데 도저히 답을 찾지 못하겠다. 이 답을 다음에 찾기로 할까, 아님 그냥 나중에 찾을까?
답을 찾는다고 하니, 글의 결론을 짓느라 골이 아플 때마다 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찾은 ‘답’을 서술한 것이 글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 글이라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 (과거처럼 쓰는 이유는 저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고 저런 유의 생각을 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세어가는 노인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쓴 문장처럼 지어졌지만 나는 머리가 세어가기보다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쪽에 그나마 가까우며 저 지난날들은 불과 몇 달 전이다.)
과정을 거쳐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끝나는 글, 물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과정이 없다면 답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과정 없이는 답도 없다’가 참인 명제라면, 이의 대우인 ‘답이 있으면 과정이 있다’ 역시 참이다. 확실히 답을 알고 있으면 문제를 풀기가 쉽다. 가끔 미로 찾기를 할 때 입구가 아닌 출구에서 시작하는 게 더 쉬울 때가 있다. 글쓰기를 할 때도, 근거는 아직 없지만 내 결론으로 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충 결론부터 써두고 어찌저찌 역추적하듯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과정 없이는 답도 없다’. 기껏 문장을 만들어 놨으니 그 안의 단어를 바꿔 넣어 재탕해 본다. ‘다음 없이는 나중도 없다’. 다음의 ‘바로 뒤’라는 뜻, 나중의 ‘맨 끝’이라는 뜻을 취사선택한다면, ‘다음’이 ‘과정’을, ‘나중’이 ‘답’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고 우겨 본다. 그러니까 ‘다음 없이는 나중도 없다’가 참이라면, 이 대우인 ‘나중이 있으면 다음도 있다’도 참이고, 결국 나에게는 잔뜩 미뤄둔 나중이 쌓여 있으니까 하나하나 역추적하다 보면 또 다음 할 일도, 다음에 쓸 글도 알아낸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