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삼프터썬

영화 <애프터썬>(Aftersun, 2022) 3차 관람 후기
글 입력 2024.11.2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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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


 

모든 것에는 첫 만남이 있다. 영화 <애프터썬>은 개봉 당시 엄마와 처음 보았다. 배급사에서 올린 인스타그램 홍보물을 대충 보았는데 영상미가 좋고 수상 경력도 꽤 있고, 아빠와 딸이 나온다고 하니 적당히 가족이 같이 보기에 좋을 주제인 줄 알았다. 예상한 것과는 꽤 달랐고 이런 영화일 줄 알았다면 엄마랑 볼 영화로 고르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 영화가 엄청 마음에 들었다. 자꾸 곱씹고 싶어 이 영화로 오피니언을 기고하기도 했다. 지금도 좋아하는 글이다.


저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영화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이 오피니언 자체가 나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뻔한 연출, 혹은 감독이 오피셜로 밝힌 의미가 아니면 쓰지 않았다. ‘틀린’ 해석이 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하지만 이 글을 쓸 때 처음으로 자의적인 해석을 꾹꾹 눌러 담아 썼고 불안하지만 만족스러운 글이 나왔다. 아마 이때부터 글의 초안을 쓸 때만큼은 ‘내가 틀릴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맞다’는 막무가내 마음가짐으로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진짜 이상한 말이지만, The 1975의 노래 중에 ‘I Always Wanna Die (Sometimes)’라는 제목의 곡이 있는데 딱 그 마음이다. 글을 구상할 때만큼은 항상 내가 옳다 (가끔).


아무리 첫인상이 좋아도, 각자의 삶이 바쁘다 보면 곧바로 또 만나기 어렵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편이 아니라 더 그렇다. 나는 이후 교환학생이 되어 유럽으로 떠났다. 거기서도 종종 이 영화가 많이 떠올랐다. 영화의 스코어와 삽입곡을 자주 듣기도 했고, 그해의 나는 칸 영화제가 열리는 시기에 칸에 있으면서도 영화제에는 참석하지 못하는 기기묘묘한 일을 겪고 있었는데, 그때 거리 곳곳이 애프터썬의 포스터가 걸려 있기도 했다. 비록 영화제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대신 칸의 바닷가에서 애프터썬 삽입곡을 듣는 영광을 누리기는 했고, 기대와 함께 떠난 여름휴가에 어딘가 구멍이 났지만 여하튼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데서도 영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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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두 번째 만남은 슬로베니아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 내용은 당시 내가 엄마에게 쓴 이메일 발췌로 갈음한다(교환학생 기간 동안 나는 엄마에게 매주 이메일을 썼다).

 


사실 류블랴나 자체에는 볼 게 그리 많지 않아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류블랴나성이 있긴 하거든. 거기 올라가려고 푸니쿨라(케이블카 같은 것) 표를 샀는데 그날 밤에 헤어질 결심을 그 위에서 야외 상영한다는 거야! 같이 간 언니가 그 영화를 엄청 좋아하고, 나도 여기서 한국 영화를 본다는 게 재밌기도 해서 저녁에 다시 와서 그때 가려고 했지.


그래서 그날 저녁에 다시 갔는데 비가 올 것 같다며 취소됐더라고. 여기 날씨가 워낙 전조 없이 비가 내리기도 해서 이해하는 바지만, 결국 그날 비가 오지 않아서 더욱 아쉬웠다. 그날 밤에는 그냥 올라가서 야경만 보고 내려왔어.


근데 거기서 조금 더 찾아보니까, 그다음 날에는 애프터썬을 하는 거야. 그 왜 나 출국하기 전에 엄마랑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 있잖아. 나 그거 엄청 좋아하고, 또 여기저기 여행할 때도 종종 생각나는 영화였는데 여기서 그걸 한다길래.


그래서 그다음 날에 바닷가 마을인 피란에 갔다가 와서 저녁에는 그 영화를 보러 갔어. 전날 취소된 헤어질 결심이 그날 일반 상영관에서 열린다길래 그거 볼까 싶기도 했는데, 애프터썬을 훨씬 좋아하기도 하고, 야외에서 보는 의미도 있고 해서 그냥 애프터썬 보러 갔지.


이때는 혼자 갔는데 구경도 할 겸해서 푸니쿨라 안 타고 걸어갔어. 저녁이라 날도 괜찮고 그냥 20분 정도 걸리는 뒷산 오르는 거라 괜찮던데. 올라가는 길에 보인 풍경도 예뻤고. 성에 도착했더니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돼있고 의자도 마련했더라고. 맥주랑 팝콘을 챙겨서 나도 자리에 앉았지.


영화 기다리다가 프로그램 이름이 Film Under the Stars인 게 생각나서 별이 보이나 하고 고개 들었는데 그때는 조명이 밝아서인지 안 보였거든. 근데 영화 도중에 그 딸이 아빠랑 내가 다른 곳에 있어도 하늘에 해를 보면 우리가 같은 해를 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다, 뭐 이런 대사 있었던 거 기억 나? 그 장면에서 다시 또 생각나서 하늘을 봤더니 그때는 엄청 선명하게 별들이 보이더라.


영화를 다시 보니까 바뀐 감상도 있고, 처음 볼 때 놓쳤던 부분 찾기도 하고 여하튼 너무 좋았어. 클라이맥스에서 퀸 언더프레셔가 나오는데 그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내가 너무너무 슬퍼서 그 노래를 못 듣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번에 봤더니 슬픈 장면이지만 슬픈 이야기만 하는 장면이 아니라고 다시 느껴져서 이제 좀 괜찮을 것 같아.


 

영화 끝나고 또 휘적휘적 걸어 내려오는데 참 좋았다.

 

(2023.7.26 엄마 현진 스물한 번째 보아라 中)

 

 

저 날은 사실 온전히 영화만 즐겼다고 하기는 어렵다. 영어 음성에 슬로베니아어 자막으로 보느라 백 퍼센트 이해하지도 못했고, 관광지의 야외극장이었기에 그리 집중하기 좋은 환경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더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도 사실이니 내게 깊은 인상을 주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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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삽입곡과 스코어는 자주 듣는다. 글쓰기 피드백 모임에서 첫 만남 당시 썼던 오피니언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에 잠겼다. 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해서 뿌듯했다. 이건 올해 초의 일.


여름에 나는 또 바닷가로 휴가를 갔다가 살을 다 태워 먹었다. 피부의 껍질이 새로 산 전자제품을 감싸는 필름처럼 벗겨졌고 지금까지도 팔다리에 선명한 경계선이 남아 흐려질 생각을 않는다. 어쨌든 그때 상황이 꽤 심각했기에 애프터썬을 처음으로 사서 발랐다. 나는 애프터썬이라는 제품이 있다는 사실을 그 영화 때문에 처음 알았기 때문에, 애프터썬을 바르면서도 아련하게 그를 생각했다. 캘럼이 직접 경험했고, 자기 딸은 경험하지 않길 바랐던 햇빛의 고통이란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구나!

 

 

 

삼프터


 

가을이 올 즈음 영화가 재개봉했다. 다시 보고 싶었으나 어쩌다 보니 시간이 잘 나지 않아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역시 사랑은 타이밍이라더니. 타이밍이 맞지 않아 우리의 연이 이렇게 끝나는 걸까 싶었는데…. 역시, 사랑은 타이밍이다. 내가 간신히 여유가 생기는 첫날에, 마지막 상영이 추가되었다. 심지어는 터덜터덜 갔는데 각본집을 비롯한 굿즈를 주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운명이 우리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해도 된다.


세 번째 만남을 갖고 첫 만남에서 썼던 오피니언을 다시 봤는데, 지금 읽어도 썩 나쁘지 않게 쓴 것 같다. 글을 쓰던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꽤 괜찮은 해석을 찾은 듯하다.


그리고 영화를 다시 보니, 마음이 더욱더 찢어진다. 다음 장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탄식하게 하던 장면이 몇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캘럼이 소피에게 호신술을 가르치는 장면이다. 아빠가 항상 네 곁에 있을 수는 없다며 손목을 잡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치는데, 소피는 손목 잡는 것 말고 다르게 공격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 묻는다. 캘럼은 대답하지 않고(혹은 소피가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다른 장면이 이어진다.


세 번째 관람 후 블로그에 남겼던 감상 마지막 줄을 인용한다.

 

 
으아아앙아아악 행복해 얘들아 괴로움은 내가 가져감
 

 

소개팅의 삼프터 이후를 칭하는 말은 없다. 첫 만남은 소개팅, 두 번째 만남은 애프터, 세 번째 만남은 삼프터. 그 이후로는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확정되고 쭉 관계가 이어지거나, 아니면 그대로 끝이거나. 둘 중 하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만남까지 이어가며 간을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애프터썬>과 나의 관계는 이제 무엇일까 결정해야 한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다. 이제는 인정한다. 최애 영화를 항상 <1917>과 <매드맥스> 중에서 고민하는데, 이제는 <애프터썬>도 그 반열에 끼울 것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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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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