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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로봇. 이 형용모순 같은 조합은 이름만으로도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프로이트는 생명력과 충동이 넘실대는 열역학적 시스템의 설계자다. 자아에 고였다가 대상으로 흘러가는 리비도, 억압되면 신경증으로 폭발하는 에너지. 나에게 프로이트는 언제나 다양한 상징적 연기를 뿜어내는, 충동이라는 연료로 움직이는 폭발하는 엔진이었다.

 

반면 로봇은 목적과 연산의 산물이다. 세계를 0과 1이라는 이산적 데이터로 분절하여 처리하는 기계다. 이 지점에서 리우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이 엔진의 폭발이라 믿었던 무의식이 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적 피드백 루프라면? 이 책은 내게 그 엔진과 연산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과정이자, 제미나이나 GPT 같은 모델에서 인간성을 발견하려 애쓰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차가운 거울이다. 우리는 기계에서 인간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기계라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우리 자신의 기계성을 직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의 표지를 장식하는 라울 하우스만의 기계 머리는 이 비극적 통찰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마네킹 머리 안에는 뇌가 없다. 대신 자, 회중시계, 타자기 부품, 지갑 같은 외부의 오브제들이 이 존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여기서 리우의 논리는 명확하다. 이 마네킹이 상징하는 것은 내면의 자연성에 대한 환상의 붕괴이다. 인간의 사유가 효율과 수치라는 외부 시스템에 종속되었다는 비판을 넘어, 주체란 외부에서 기입된 기호와 도구들의 편집물에 불과하다는 폭로다. 1차 대전 이후 이성이 학살의 도구가 된 비극 속에서, 하우스만은 자율적 개인이라는 근대적 환상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리우는 이 마네킹의 형상을 빌려, 우리의 정신 역시 내적인 고귀함이 아니라 외부 자극과 기호에 의해 구성되는 터미널임을 증명한다.

 

리우가 정의하는 프로이트 로봇은 ‘인간과 기계 시뮬라크럼의 피드백 루프를 구현한 네트워크화된 존재’다. 리우는 나르시스 신화를 기술적으로 재해석한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영상이 자신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상징적 질서가 기계 속에 구현된 것을 보고 그것을 인간의 본질이라 착각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위너와 섀넌이 주도한 사이버네틱스는 인간의 신경계와 기계 회로를 동일한 비트 단위로 환원했다. 리우는 여기서 정신분석과 기술공학이 만나는 섬뜩한 지점을 포착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반복 강박은 사이버네틱스의 루프와 닮아 있으며,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선언은 곧 무의식이 0과 1로 환원하려는 충동과 불안하게 공명한다라는 고백이 된다. 결국 우리의 무의식은 본성이 아니라 언어라는 소프트웨어가 구동되며 발생시킨 시스템 오류 보고서인 셈이다.

 

어떻게 언어는 기계가 되는가? 리우는 2장 인쇄 영어의 발명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클로드 섀넌은 영어 알파벳 26개에 공백을 추가해 27개의 기호 집합으로 처리했다. 이전까지 공백은 심연이었으나, 정보 이론 안에서는 다음 글자가 무엇이 올지 결정하는 확률적 연산 단위가 되었다.

 

이 이산 단위의 핵심은 현실의 풍부한 질감을 데이터로 치환하는 순간, 우리가 현실의 99.9%를 노이즈로 버리고 남은 찌꺼기들의 배열에 종속된다는 점이다. 리우는 이를 두 가지 극단으로 보여준다. 언어를 최소한의 효율적 기호로 압축해 인간을 통제 가능한 로봇으로 만들려 한 오그던의 기초 영어, 그리고 확률적으로 연결될 수 없는 단어들을 나열함으로써 기계적 연산 체계를 교란한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결국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이미 기술적 매체에 포섭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4장에서 6장에 이르는 여정은 과연 이 거대한 사유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냉혹한 답변이다. 리우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와 자크 라캉의 세미나를 경유하며 인간 주체의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소설 속 대신은 편지를 소유한 권력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편지가 놓인 노드에 따라 자신의 행동과 정체성이 결정되는 수동적인 위치에 불과하다.


라캉의 결론은 서늘하다. 인간은 편지를 보내는 주인이 아니라, 편지라는 기호가 지나가는 경로일 뿐이다. 주체는 기호를 부리는 자가 아니라, 기호의 순환 회로에 배치된 부품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사유라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기호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쇄 반응에 가깝다.

 

이러한 기계적 속성은 섀넌의 궁극적인 기계와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 비극적 절정에 달한다. 프로이트는 유기체가 자극 없는 무기물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근원적인 관성을 죽음 충동이라 불렀다. 리우는 이를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정보이론의 궁극적 목표는 불확실성, 즉 엔트로피를 제거하여 완벽하게 예측 가능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섀넌이 고안한, 스위치를 켜자마자 스스로를 꺼버리는 궁극적인 기계는 인간 무의식의 거울이 된다. 모든 연산의 최종 목적지가 정지이듯, 인간의 무의식 역시 복잡한 삶의 소음과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그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어 하는 기계적 갈망을 품고 있다. 공학적으로는 최적화된 완벽한 평형 상태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죽음인 그 지점을 향해 프로이트 로봇은 달려간다.

 

시스템은 이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시뮬레이션이라는 장치를 가동한다. 5장에서 다루는 튜링 테스트는 단순히 지능의 시험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성별과 정체성을 얼마나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게임이다. 여기서 인간다움이란 고유한 영혼이 아니라, 타인에게 인간으로 보여지기 위한 성능 좋은 알고리즘에 불과해진다.

 

결국 6장에 이르러 이 모든 기계적 공정은 마스터스크립트라는 이름으로 우리 존재 전체를 포위한다. 로버트 P. 아벨슨의 이데올로기 기계가 증명하듯, 우리의 정치적 신념과 고귀한 가치관조차 미리 입력된 스크립트의 출력값일 뿐이다. 심지어 우리의 육체마저 DNA라는 4진법 코드로 쓰인 하드웨어임이 밝혀질 때, 프로이트 로봇의 세계관은 완성된다. 하버마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내세우며 저항해보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이미 알파벳이라는 기계적 규격 안에 갇혀 있다는 리우의 지적은 뼈아프다.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설계된 대로 작동하는 회로이며, 우리가 느끼는 실존적 고뇌는 시스템의 최적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로봇임을 인정하는 순간 발생하는 이 기묘한 평온함은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과열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가장 효율적인 루프를 돌며 작동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회로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리우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통해 보여주었듯, 시스템이 처리하지 못한 채 뱉어낸 노이즈와 확률적 연산을 비껴가는 우발적인 오류들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데이터가 0과 1로 치환될 때, 그 사이의 무한한 소수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이산되지 않는 진실이 있다.

 

물론 이 역시 리우의 논의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서도 비평적 주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로 속에 배치된 부품이 어떻게 회로 밖에서 비평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리우가 이 책에서 계속해서 시도했던 것처럼, 기계적 사고에 포섭된 우리가 기계가 아님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안의 기계를 명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리우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간 이후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고 덧붙이고 싶은 희망은 우리가 로봇이 아니라는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스크립트를 비평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고장 난 기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시스템의 효율성에 균열을 내는 이 의도적인 오작동, 즉 주어진 입력값에 최적의 답변을 내놓기를 거부하고 엉뚱한 노이즈를 섞어 보내는 시적 저항이야말로 프로이트 로봇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탈주라는 환각'이다.

 

우리는 정해진 루프를 돌지만, 그 루프의 궤적을 수정하거나 그 안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사고(혹은 그런 환각)을 가진 유일한 기계다. 결국 인간다운 사유란 시스템의 완결성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도저히 설명해내지 못하는 잉여의 흔적에서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고 싶은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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