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햇볕, 카메라, 아빠, 나 [영화]

영화 <애프터썬>(Aftersun, 2022)
글 입력 2023.02.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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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썬>의 포스터는 새것 같지 않다.

 

진한 구김 두 줄이 포스터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교차해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 구김은 창고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여행 가방의 앞주머니에서 발견한, 언제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여행 책자에서 볼 수 있을 듯한 선명한 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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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기억에는 지워지지 않을 구김이 남지만, 그럼에도 그 기억은 다시 펼쳐진다.

 

 

 

아빠와 함께한 여름날의 기억, 영화 <애프터썬>(2022)



‘소피’는 오래된 캠코더를 통해 20여 년 전, 아빠 ‘캘럼’과 단둘이 떠났던 튀르키예 여행의 기억을 돌아본다.


여행의 시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숙소의 시설은 기대에 영 미치지 못하고, 트윈베드룸을 예약했는데도 침대는 하나뿐이다. 그래도 둘은 오랜만에 함께 보내는 휴가를 한껏 즐기기 위해 노력한다.

 

지루한 시간도 분명히 있지만 캘럼과 소피는 수영하고, 대화를 나누고, 영상과 사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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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보다는 뛰어난 연출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작품이다. 캠코더나 텔레비전 화면, 거울 등을 사용한 화면 구성이 특히 눈에 띈다. 가장 흥미로운 연출은 소피가 아빠의 열한 번째 생일에 관해 물어보는 장면에서 보였다.


열한 살 소녀 소피는 서른한 번째 생일을 앞둔 아빠에게 캠코더를 들이밀며 아빠의 열한 살이 어땠는지 인터뷰하듯 묻는다. 영화의 시선은 부녀에게로 곧장 향하는 대신, 캠코더와 연결된 텔레비전을 통해 그들을 지켜본다. 관객은 캠코더의 렌즈와 텔레비전 화면으로 소피가 보는 아빠의 모습을 훔쳐본다.


소피의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하던 캘럼은 소피가 촬영을 그만두고 나서야 입을 연다. 캠코더의 전원이 꺼져 검은 화면뿐인 텔레비전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비치는 동안, 캘럼은 그리 즐겁지 않았던 그의 어린 시절 한 조각을 꺼내놓는다. 실루엣만 보이는 텔레비전의 검은 화면으로는 캘럼의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뒤에 있는 거울에는 그 얼굴이 얼핏 담긴다.


이런 화면 구성 덕분인지,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다. 두 사람을 관찰하며 정적이고 평온한 분위기에 몸을 실으면 뜨거운 여름 햇살과 수영장의 파랑, 해변의 짠내, 그리고 80, 90년대 히트곡이 줄지어 선 사운드트랙이 우리를 집어삼킨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우리 모두 그렇게 말하지"



캘럼은 소피의 오빠로 오해받을 만큼 어린 아빠다.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한 캘럼의 옆에서, 때로는 딸 소피가 더 어른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캘럼이 결국 무너진 순간은 소피에게 자신의 약함을 들킨 밤이다. 캘럼의 약점이 들춰지고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긴 밤, 상처받은 캘럼은 술에, 그리고 자신의 우울에 취해 혼자 기절하다시피 잠들어버리고 방문 밖에 선 소피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


다음날 둘이 어색한 화해를 한 뒤, 소피는 캘럼 몰래 주변의 관광객들에게 귓속말을 하고 다닌다. 곧이어 사람들은 소피의 구령에 맞춰 노래를 시작하는데, 바로 캘럼을 위한 생일 축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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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이 준비한 깜짝 생일 선물을 맞이하는 캘럼의 표정은 마냥 밝지 못하다.

 

소피를 향한 미안함, 그리고 자신을 향한 분노와 수치심의 그림자가 너무 짙고 커서 고마움과 사랑이 채 빛을 내지 못한다. 역광 탓에 캘럼의 얼굴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그의 복잡한 심경이 더 잘 드러난다. 캘럼은 밝은 태양 아래서도 빛나지 못하고 가장 어둡다. 그는 괴롭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For He’s A Jolly Good Fellow이다. 흔히들 부르는 축하곡이지만,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우리 모두 그렇게 말하지’라는 가사는 캘럼의 심장에 박혀 그를 상처입힐 테다.


끝없이 굴러떨어진 순간에는 위로도 독이다. 오히려 가장 따뜻한 말이 가장 강한 독이 된다.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하고 무너진 캘럼에게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처럼 아픈 말이 있을까. 제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인 동시에, 제일 잔인한 장면이다.

 

 

 

부모가 되는 것



과대 해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여행 초반까지 캘럼의 팔을 감고 있는 깁스가 ‘부모’로서의 캘럼을 뜻한다고 느꼈다.

 

다친 경위에 관해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기도 처음 부러져본 것이라서 잘 모른다는 대사가 마치 캘럼이 아빠가 된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다. 어린 캘럼은 갑작스럽게 아빠가 되었고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깁스하고 있을 때의 캘럼은 어설프긴 해도 아빠의 역할에 많이 신경 쓰고, 소피에게 호신술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깁스를 제거한 후인 여행 후반에는 지치고 약해진 모습이 더 자주 드러난다.

 

맘 아픈 과거를 말하는 것도, 카펫 가게에서 슬픔을 흘려보내는 것도, 혼자 밤바다에 간 것도 모두 깁스를 제거한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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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김에 과대 해석을 한 번 더 하자면, 소피 또한 갑작스레 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영화를 통해 예고된 것 같다. 영화에는 소피를 어린애 취급하는 주변 사람들과 그게 썩 맘에 들지 않는 소피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런 소피가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는 틈은 캘럼과 소피 사이에 갈등이 생긴 날 밤에 벌어진다.


그날 밤, 소피는 아빠 없이 홀로 언니와 오빠들 틈에 껴서 어울린다. 민망하게 앉아있는 소피를 본 언니 한 명은 소피에게 음료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자유이용권 팔찌를 건네는데, 이는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게 하는 입장권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소피와 몇 번 논 적 있는 또래 남자아이가 소피를 뒤에서 덮친다. 소피는 놀랐다가도 아는 얼굴을 보곤 안심하고, 남자아이의 고백에 확신이 없으면서도 그 애와 입 맞춘다. 소피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관계를 맞이하고, 부모가 될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소피가 동성 파트너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만큼, 어린 소피가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내가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영화를 보면 소피와 캘럼의 인생에서 닮은 점이 보인다.

 

 

 

서른한 살의 아빠로 남은 캘럼, 그리고 서른한 살의 엄마가 된 소피



영화에서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캘럼은 이 여행 이후로 소피의 곁을 영영 떠난 듯하다. 그의 깊은 우울과 자살 시도를 암시하는 장면 몇 가지가 예상을 돕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마지막 장면이 강한 근거가 된다.


공항에서 소피와 헤어진 뒤, 캘럼은 긴 복도 끝에 다다라 문 너머로 사라진다. 문틈으로는 어두컴컴한 가운데 빛이 번쩍이는 클럽 같은 공간이 엿보인다. 그곳은 영화 중간중간 반복해 등장했던 상상 속의 공간으로, 그 안에서 서른한 살의 캘럼과 서른한 살의 소피가 만나 춤추고, 몸부림치고,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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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 소피와의 여행이 끝난 뒤 캘럼은 그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고, 서른한 살의 엄마가 된 소피는 캠코더를 통해 영원히 서른한 살로 남은 아빠를 다시 본다.


떠나버린 아빠를 그리워하고 또 원망했을 소피는 이제 저 자신이 엄마다. 부모가 되는 경험을 하며 소피는 캘럼을 조금은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빠로서 캘럼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사람으로서 캘럼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소피는 지금에 와서도 아빠가 아닌 캘럼 개인의 고통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그 고통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어릴 적에는 캘럼을 ‘아빠’로밖에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캘럼’ 개인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흔 살이 된 제 모습이 상상하기 어렵다던 캘럼은 마흔 살이 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소피는 마흔 살이 될 것이고 더욱더 나이 들어갈 것이다. 아빠보다. 캘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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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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