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꽃갈피 앨범 중 여름밤의 꿈
반복해서 걷는 길엔 눈에 익숙한 풍경들만 걸리게 된다. 나는 걸으며 노래 듣는 걸 좋아해, 출퇴근길 15분 가량은 꼭 걷곤 한다. 매일 아침마다 비슷한 시간에 마주치는 리트리버, 코너의 과일가게, 떡볶이집, 제빵사님 이름이 걸린 동네 빵집, 순회하듯 눈도장을 찍으며 가다보면 어느새 지하철 역, 혹은 회사에 다다른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조금 색다른 경험을 했다. 걷는 속도가 달라지면, 동네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평소 나는 걸음이 아주 빠른 편이지만, 그 날은 피곤함 탓에 평소보다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평소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깊은 계단이 보였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 끝에는 ‘책’이라는 낡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 계단을 내려갔다. 그 담백한 글자의 정체가 뭔지 너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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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상가가 많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책방이 보였는데, 입구에 ‘행복한 글간’이라 씌어있었다.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깔끔했다. 오래된 가구들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또, 책상 위에는 책방 주인 어르신의 큐레이션에 따라 정돈된 책들이 즐비해 있었다. 누군가의 서재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최근 전자책 사이트를 구독한 나는 종이책에 돈을 더 들이진 않겠다고 다짐했었으나, 마음이 이끌려 이곳 저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 책방엔 사람이 많았다.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도 많았는데, 그 아이들도 책방 사이 바닥에 털썩 앉아 차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책방의 분위기를 천천히 파악한 후에야 나는 낯선 곳에 대한 긴장감을 내려놓고 책방을 여러 바퀴 돌았다. 그 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건 나 뿐이었다.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동네 책방이기도 하고, 이렇게나 분위기를 휘저어 놓았으니 책을 사는 게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을 몇 번 더 주시하다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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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대에 책을 내려놓자, 내가 고른 책을 다시 집어든 책방 주인 어르신이 말을 걸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피곤한 채로 천천히 걷고 있었고, 우연히 계단을 보게 되었고, 간판에 ‘책’이라는 큰 글자가 보였고,.. 책을 훔치려던 사람 마냥, 이곳에 온 정당한 이유가 필요한 사람처럼, 사건 진술을 하듯 온갖 TMI를 늘어놓다보니 조금 민망해졌다. 이상해보였겠지, 나는 왜 이럴까 하며 또 자책감에 휘말리고 있을 때 어르신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원래 오던 사람들만 오거든요. 자주 오세요. 이용 방법 설명해 줄게요.”
내 횡설수설함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르신은 책갈피를 하나 건네시며 이용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보고 싶은 책을 신청하는 법, 재고를 확인하는 법, 그리고 책갈피 끝에 작게 그려진 어르신의 캐릭터 설명까지. 나는 책갈피와 새 책을 손에 꼭 쥔채로 다음에 또 오겠다 인사하고 책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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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자 마음이 몽글해졌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도로가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인 강릉에서 자주 느끼곤 했던 감정이었다. 느긋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모여 차분하게 삶을 꾸려가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공기. 이 책방 안에서 그런 기분을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심지어 퇴근 길에 이런 여유를 다시 가져볼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선물을 받은 듯한 마음으로 책을 꼭 쥐고 다시 걸었다.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섰다. 지하철역에 내려 회사로 걸어가는 15분 가량의 길을 이번엔 다른 골목으로 돌았다. 다른 가게들이 눈에 보였다. 평소 보지 못했던 흔적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생각했다. 출근하던 시간보다 30분 가량 일찍 도착해 나는 평소 잘 가지 않는 옥상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구석의 큰 나무 의자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가끔은 루틴을 벗어나야겠다. 안 가던 곳을 가 봐야지. 또 그 책방에 들러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익숙한 출퇴근길, 매번 도는 동네에서 나는 고작 천천히 걸었다는 이유 하나로 선물 같은 새로움을 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