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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 '여름은 고작 계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슈만 트로이메라이
‘다시는 볼 수 없다.’라는 말은 늘 먹먹하다. 내가 한 말들을 되감을 수도 없고, 또 다시 그 위에 추억을 덮을 수도 없다. 당시의 미성숙함 그대로 상대방과의 시간을 되새기며 헤메는 것 밖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감각은 대체로 너무 버겁다.
그래서 나는 이별이나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를 잘 접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등장인물이 삶을 끝맺는 모습을 보는 건 마음 깊이 꽤나 큰 잔상을 남기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밝은 표지에 이끌려 불가피하게 집어 읽은 ‘여름은 고작 계절’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마음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여름은 고작 계절’은 잊을 수 없는 과거와 그 먹먹함의 끝을 회상하는 주인공 제니의 회고록이다.

여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밝다. 생기 있고, 맑은, 덥지만 상쾌하고 발랄한 느낌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 뒷면엔 감춰진 것들이 많다. 억센 장대비는 애써 피워낸 많은 것들을 순식간에 쓸어가버리기도 한다. 반 이상이 흐리고 비가 내리는 계절이지만, 제니 가족은 여름의 밝은 단면을 꿈꾸며 미국으로 떠났다.
2000년대.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절이었다. 정보도 부족했던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나기만 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낙원이라 여겼던 곳에서, 제니 가족이 마주한 현실은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인종차별, 변변찮은 일자리, 미숙한 언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 가족 간의 단절. 이 모든 것들이 제니의 어린 시절을 이루었고, 자연스럽게 제니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쳤다.
한나는 제니와 비슷한 상황의 이민자 가족이었다. 형편이 비교적 넉넉하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한국인들에게 배척 당하고 무시 당하는 건 여느 이민자 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제니는 한나와 같은 부류로 묶이고 싶지 않아 한나를 늘 피해다녔지만, 마음 한 켠엔 동질감을 품고 있었다.
한나는 제니를 계속 두드렸고, 결국 제니의 마음을 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니는 다른 어떤 표면적인 관계보다도 한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진심어린 인간관계를 쌓게 된 제니는 그 과정이 모두 혼란스럽기만 했다.
모든 것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되고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니는 그 과정과 감정을 모두 갈무리하기도 전에 친구 한나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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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제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 자존감은 너무 작아서, 아주 작은 손길에도 가득 채워지곤 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한나를 외면하고 미국 사회에 섞여들길 노력하며 채워온 제니의 불안한 자존감이 생각났다. 타인에게서 받는 표면적인 인정을 통해 채울 수 있는 자존감의 두께는 너무도 얕다. 한나는 제니의 자존감을 두텁고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름은 고작 계절’에서 보여준 제니의 이야기는 보편적으로 학창시절을 거쳐온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감정을 내포한다. 비단 인종이 다른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 작은 집단 속에 섞여들기 위해 노력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나와 제니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는 한 겹 벗겨내면 드러날 작은 껍질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나 또한 학창시절 제니처럼, 진정한 가치보다 눈 앞의 인정에 흔들릴 때가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또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왜인지 나는 또 그 모습을 반복하고 만다. 어렸을 때 깨달았던 내 단점이 여전히 한 켠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나는 발전 없는 내 모습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제니는 어떤 마음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한나와의 일화를 풀어놓을 수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자책감이 섞인 기억을 다시 되짚는다는 건, 그때의 부족함을 온전히 직시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기 전까지, 제니가 아메리칸 드림을 떠났던 그 순간부터 본인이 느낀 감정의 흐름을 정면으로 마주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고작 계절에 불과했을 그 짧은 여름이 제니의 삶에 어떻게 남아있었을까. 그 생각이 오래도록 마음에 맴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