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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터미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트리오 ‘Kegelstatt'
오랜만에 가족과 휴가를 보냈다. 몇 달 만의 만남이었다. 휴가 이틀 차, 우리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관에 도착해 최근 상영작을 살펴 보는데, 쉽게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각자 보고 싶은 영화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 무서울 것 같다”, “이건 너무 슬퍼”, “이건 좀 재미 없을 듯”
많은 예측과 반대 속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영화관에서 팝콘만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넷플릭스로 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의견이 오갔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시간들이 한 차례 흘렀다. 팝콘을 반 통 정도 비운 후에야 우리는 영화를 틀었다. 그렇게 여러 후보를 지나쳐 결국 선택한 영화는 ‘터미널’ 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터미널’이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너무 잔인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가족용 무난한 영화일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가가 끝나고도, 나는 여전히 영화의 장면들을 곱씹고 있다.
영화 터미널
‘터미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주인공 빅터는 가상의 국가 크라코지아에서 뉴욕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과 동시에 고국에서 내전이 발발한다. 미국 정부는 크라코지아 국민들의 비자를 취소하고, 모든 항공편을 중단한다. 그 결과 빅터는 미국 땅을 밟을 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빅터가 공항에서 보내는 9개월의 시간을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이게만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을 밝고 따뜻하게 비춘다. 빅터가 깊게 좌절하는 순간은 단 한 번, 고국의 내전 소식을 TV로 접했을 때 뿐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낙천적인 태도와 성실한 기다림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난관들을 하나씩 넘어선다.
빅터가 뉴욕 땅을 밟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영화는 희망과 행동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연이어 보여주는 ‘안 될 것 같은’ 순간들을 통해, 행동의 나비효과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빅터는 연속적으로 위기를 맞지만, 그 때마다 그는 행동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
'안 될 것 같은 순간'
‘안 될 것 같은 순간’의 시작은 식권을 잃어버렸을 때였다. 여행객의 가방을 닫는 걸 도와주다 공항 측에서 받은 식권을 모두 잃어버린 빅터는, 한순간에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도 없는 상황, 도저히 그 어떤 것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빅터는 방법을 찾는다. 바로 공항 카트를 수거해 25센트를 버는 것이다. 작은 수입이지만, 그것으로 식사를 이어가며 빅터는 첫 번째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곧이어 카트 수거 관리 직원이 생기고. 빅터는 겨우 얻게 된 수입원을 빼앗긴다. 카트로 수익을 벌 수 없게 된 빅터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한다. 공항 기내식 직원 엔리케를 도우며 입국 심사관 돌로레스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다. 빅터의 세심한 관찰과 성실한 기록은 결국 엔리케와 돌로레스를 이어주었고, 그는 그 대가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후 빅터는 끼니 외의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항 내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한다.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대부분 거절당했지만, 도배 실력을 우연히 본 인부들이 그를 공사 인원으로 고용하면서 또 다른 돌파구가 열리게 된다.

그렇다면 빅터는 왜 그토록 긴 시간을 감수하면서 뉴욕 땅을 밟아야 했을까?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 질문에 답한다.
그가 원한 건 다름 아닌 한 재즈 연주자의 사인이었다. 과거, 빅터의 아버지는 생전에 좋아하던 재즈 연주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거의 모두에게서 답장으로 사인을 받았지만 단 한 명, 색소폰 연주자 베니 골슨의 사인은 받지 못했다. 빅터는 베니 골슨의 사인을 얻기 위해 9개월을 그 공항에서 버틴 것이다.
그 수많은 ‘안 될 것 같은 순간’을 뚫고 빅터가 얻고자 했던 베니 골슨의 사인을 얻기 위해 재즈 클럽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우리는 또 다른 긴장감을 얻는다.
‘베니 골슨이 그 편지를 받고 사인을 안 준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 긴 나날들을 거치고 도착한 빅터의 시간들이 헛된 건 아니었을까?’
‘사인을 해주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골슨은 빅터에게 흔쾌히 사인을 해준다. 그렇게 빅터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 사인을 캔에 넣어 택시를 타는 빅터를 보면서, 우리는 계속 봤던 ‘안 될 것 같은 순간들’과,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던 빅터의 행동과 가치관을 인상적이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이렇게, ‘안 될 것 같은’ 순간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결국 행동을 통해 가능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담아낸다. 누구나 좌절할 것 같은 순간에도 깊게 잠식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불러올 수 있는 반향에 대해서 아주 희망적이고 따뜻한 목소리로 전한다. 그 작은 발걸음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힘
우리 또한 살면서 수많은 ‘안될 것 같은 순간’들을 겪는다. 영화를 고르는 것 같은 사소한 결정조차도 많은 불가능의 이유로 미뤄지는 것이다. “안 될 것 같다”라는 말이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그러나 빅터가 보여준 것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은 기다림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공항에서 보낸 9개월은 빅터가 허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삶은 빅터가 살아온 시간 전체를 응축해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우리 삶을 비추는 축소판이 된다.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역경을 견디며 결국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우리도 안 될 것 같다며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순간들을 가능성으로 바꿔갈 수 있기를, 그 마음을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