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 헤이그 공연 사진 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3154749_hhuuhdoy.jpg)
모국어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말을 한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열려 있으며, 들어주는 사람이 있단 뜻이다. 모국어를 눈치 안 보고 입 밖으로 꺼내는 것 또한 여러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외국에 있거나 외국인들 사이 홀로 한국인일 경우, 한국어를 당당하게 말하기엔 조심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모국어를 잃고, 나라의 주권과 조국의 봄을 빼앗긴 상황이라면 쉽사리 입을 열 수 있을까.
1907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명을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간 특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헤이그>가 2026년 4월 1일 서울 대학로 NOL 유니플렉스 1관에서 개막했다. 6월 21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헤이그>는 실존 인물인 헤이그 특사(이상설·이준·이위종)들에 가상 인물들(나정우·나선우·홍채경)의 이야기를 더해 만든 작품이다.
헤이그 특사들은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는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 황제라는 이름만 있을 뿐, 일본에 의해 손발이 묶이고 입도 막혔던 고종은 특사들에게 많은 걸 걸었다. 하지만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다. 일본의 방해 공작과 열강들의 외면 속에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헤이그 일간지에 호소문을 보도하고 인터뷰·연설을 하며 목소리를 냈다.
뮤지컬 <헤이그>는 특사들이 열차에 타고 헤이그로 향하는 과정 및 열차에 오른 나정우와 홍채경의 이야기를 작품 대부분에 할애했다. 특사 이준과 가상 인물 나선우를 친구로 설정해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을 연결한 <헤이그>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진자료] 헤이그 무대 사진 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3154816_qkqrndba.jpg)
이준은 나선우가 쓴 소설 ‘조선의 봄’을 몰래 신문사에 투고해 그를 작가로 데뷔시켰다. 부모를 잃고 양아버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 미국 출신 선교사이자 외국인 독립운동가.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도왔다) 밑에서 자란 홍채경은 그의 소설에 위로받는다. ‘조선의 봄’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만, 소설은 나선우를 포함한 수많은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나선우 동생 나정우는 형의 죽음이 이준 탓이라 여긴다. 홍채경은 특사들을 돕기 위해 헤이그행 열차에 오르고, 나정우는 홍채경을 따라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대한제국의 운명을 실은 열차는 헤이그를 향해 달린다.
뮤지컬 <헤이그>는 영상 연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한제국, 연해주, 열차 등 다양한 시공간적 배경을 선보였다. 또한 작품은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홍채경의 서사와 캐릭터 구현에 공을 들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애국심을 품고 씩씩하게 성장한 홍채경은 특사들을 돕기 위해 열차에 올랐고, 일본에 저항하다 짧은 생을 마쳤다. 일본군들과 홍채경의 액션 장면은 뮤지컬 <헤이그>의 백미 중 하나다.
조국을 빼앗긴 시대를 다루는 작품엔 정의롭고 용감한 인물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냉소적이고, 겁 많고, 주변인들의 투쟁 의지를 말리는 인물은 꼭 나오기 마련이다. 핵심은 그 인물이 이야기의 끝에서 어떻게 ‘변화’하느냐다. 뮤지컬 <헤이그>에선 나선우 동생 나정우가 변화하는 주인공이다. 나선우의 소설을 투고한 이준 검사가 형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생각하고, 헤이그행 열차에 오른 홍채경을 따르긴 해도 여전히 냉소적이다. 형의 기억을 붙든 채 주변인을 원망하던 그가 진짜로 분노해야 할 대상은 일본이란 걸 깨달을 때 극은 끝난다.
이처럼 뮤지컬 <헤이그>는 가상 인물들 이야기에 힘을 더 실었다. 정확한 순국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준 검사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묘사했으며, 그가 나선우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품은 감정선 또한 추가했다.
![[사진자료] 헤이그 공연 사진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3154846_bxtlommc.jpg)
가상 인물과 실존 인물 사이 다리가 되는 이준의 비중은 크지만, 이상설과 이위종의 캐릭터성은 이준에 비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세 특사가 대한제국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호소할 때, 실제 헤이그 특사들의 행보보다 극 중 인물들의 모습이 더 힘없고 무기력해 보이는 것은 다소 아쉬운 점이다.
실제 특사들은 외국어에 능했던 이위종을 중심으로 헤이그 일간지(Courrier de la conference)와 인터뷰를 하며 일제의 만행을 알렸으며, 전 세계 언론을 이용한 여론전을 펼치며 연설 또한 강행했다. 부러질지언정 숙이지는 않는 이들의 ‘기세’를 극 중에도 녹여냈다면, 후반 장면들이 더 입체적이고 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뮤지컬 <헤이그>는 헤이그 특사를 소재로 상업 뮤지컬을 만들었단 점에서 가치 있는 선택을 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국내 뮤지컬 시장엔 외국인 관객의 유입이 꾸준한 편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에 원정 관람을 가는 것처럼, 대한민국 서울로 뮤지컬 원정 관람을 오는 외국인이 적지 않단 뜻이다.
코로나 시기부턴 공연 중계가 활성화되며 글로벌 관객의 규모는 점점 늘어왔다. 국공립 극장들 외에도, 일반 상업 극장에서도 외국어 자막이나 자막 안경을 제공하는 사례가 많다는 게 그 증거다. 또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2025년 토니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뮤지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처음부터 뮤지컬로 커리어를 시작한 뮤지컬 배우들도, 아이돌·연예인 출신 못지않은 팬덤을 가진 경우도 많다.
한국 뮤지컬과 배우를 보기 위해 꾸준히 한국을 찾는 외국 관객 국적의 대다수는 일본·중국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중일 세 국가는 역사적으로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일본·중국 관객이 아무리 한국을 좋아할지라도, 자신의 모국이 타국 작품에서 우스꽝스럽게 풍자되거나 악하게 묘사되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사진자료] 헤이그 공연 사진 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3154906_azkhfhlk.jpg)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극은 많지만, 독립 투쟁은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도 꽤 있다. 경성이란 시공간적 배경과 분위기만 소비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뮤지컬 <헤이그>는, 헤이그 특사라는 실패한 프로젝트와 혼란스러운 시국을 견딘 청년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신과 용기를 보였다.
쉽지 않은 소재로 대학로 상업 뮤지컬을 제작한 <헤이그>의 신념처럼, 극 중 특사들과 세 가상 인물 또한 저마다의 뜻을 품고 그 시간을 뜨겁게 살았다. 실패한 특사 파견, 비극적 결말, 연이은 자결 순국이란 단어로 이들의 마음을 표현하기엔 아픈 시대였다. 역사에 이름이 남은 인물들, 그들과 같은 시간을 살았던 평범한 이들의 염원이 모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바람은 당시엔 허공에 흩어졌지만, 결국 ‘조선의 봄’이 되어 대한민국의 찬란한 봄을 꽃피웠다. 말할 수 없었고, 들어주는 이가 없었더라도 결국 이들의 ‘말’은 극장을 찾는 관객의 가슴에 닿았다. 그들의 용기와 선택을 잊지 않는 한, 오늘날 대한민국에 찾아온 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