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서울은 가을빛과 음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10월 22일 롯데콘서트홀, 북독일의 상징이라 불리는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1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지휘는 앨런 길버트, 그리고 협연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 프로그램은 안나 클라인의 <요동치는 바다(Restless Oceans)>,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7번이었다. 첫 곡부터 마지막까지, '북독일의 정제된 음향'과 '중부 유럽의 낭만적 정서'가 맞닿는 여정이었다.
[프로그램 구성]
안나 클라인 <요동치는 바다>
Anna Clyne Restless Oceans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Op. 77
Brahms Violin Concerto, Op. 77
I. Allegro non troppo
II. Adagio
III.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Op. 70
Dvořák Symphony No. 7, Op. 70
I. Allegro maestoso
II. Poco adagio
III. Scherzo. Vivace
IV. Finale. Allegro
북독일의 품격, 엘프필하모니의 이름으로

1945년 창단된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함부르크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다.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 귄터 반트,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같은 전설적인 지휘자들이 남긴 궤적 위에 서 있으며, 브람스의 고향이자 독일 낭만주의의 뿌리가 되는 도시에서 활동해 왔다. 2017년 엘프필하모니 콘서트홀 개관과 함께 새로운 이름을 얻으며, 지금은 '함부르크의 사운드'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휘자 앨런 길버트는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지냈던 인물로, 고전과 현대를 자유롭게 오가는 균형 감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이끄는 엘프필하모니는 단단한 앙상블과 세련된 질감으로 북유럽 특유의 절제된 음향미를 구현한다.
이번 내한 무대에서도 그들의 정체성은 명확했다. 첫 곡 안나 클라인의 <요동치는 바다>에서부터 현악의 밀도와 금관의 질서가 완벽히 정렬되어 있었다. 바다의 거센 파도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깊은 울림이었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다 함께 발을 구르며 구호를 외칠 때, 안나 클라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힘과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이 하나로 모였다. 마치 거친 파도가 지나간다 해도 우리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앨런 길버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아마도 그런 연대의 힘이었을 것이다.
바이올린으로 노래를 부르듯 — 조슈아 벨

조슈아 벨은 지난 40년간 전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와 무대에 선 바이올리니스트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사랑받는 연주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감정의 극단보다는 '사람의 목소리 같은 울림'을 남긴다.
이번 무대에서도 그랬다. 그는 브람스의 협주곡을 화려하게 끌어올리기보다, 악보 안쪽의 내면의 따스함을 꺼내 보였다. 첫 악장의 서두에서 그는 절제된 긴장감으로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었고, 2악장에서는 오보에와의 대화 속에 그윽한 서정을 담았다. 브람스가 그려낸 견고한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벨은 그 인간이 내는 사랑과 슬픔을 동시에 품은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그의 스트라디바리우스(1713년 후버먼)는 마치 오래된 나무가 다시 숨을 쉬는 듯, 따뜻하고도 정직한 소리를 내며 마지막 악장에서는 오케스트라와 완벽히 맞물려, 브람스의 구조적 리듬을 생동감 있게 완성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었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보헤미아의 그늘과 빛
2부에서 연주된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은 체코 민족 정체성이 농축된 작품이다. 그의 교향곡 중 가장 어두우면서도 강렬한 곡으로, 개인의 고뇌와 조국의 운명이 교차한다.
앨런 길버트는 첫 악장부터 유려한 호흡으로 전체의 긴장을 잡았다. 엘프필하모니의 현악 파트는 밀도 있고 정제된 사운드로 주제를 쌓아 올렸고, 목관은 슬픔과 희망의 경계를 넘나들며 드라마를 만들었다. 특히 2악장의 Poco adagio에서는, 바람이 잠시 멎은 듯한 고요함 속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천천히 흘렀다. 마지막 악장은 폭풍처럼 밀려드는 리듬과 함께 결연한 에너지를 터뜨렸다.
드보르자크가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 오케스트라는 절묘한 균형감으로 증명해 냈다.

브람스와 드보르자크, 두 거장의 대화
이번 공연이 더 특별했던 이유는 프로그램이 브람스와 드보르자크—서로를 깊이 이해한 이 두 낭만주의 작곡가의 만남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877년, 무명의 체코 청년이던 드보르자크는 빈의 작곡상 심사 위원이던 브람스에게 처음 이름을 알렸다. 브람스는 그의 악보를 보고 곧바로 출판사에 추천했고, 그 덕분에 <슬라브 무곡>이 세상에 나왔다. 드보르자크는 그때의 도움을 평생 잊지 않았다. 브람스는 형식미와 균형을, 드보르자크는 민족적 선율과 따뜻한 서정을 지녔다. 브람스의 협주곡이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이라면,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7번은 '인간이 세상과 맞닿는 방식'이다. 한쪽은 고독 속의 울림이고, 다른 한쪽은 공동체의 노래다.
브람스가 만들어 놓은 구조 위에서 드보르자크는 자신의 보헤미안 정서를 자유롭게 흘려보냈다. 이 두 작품이 같은 무대 위에서 만나는 것은, 결국 음악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이어지는 대화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브람스의 고향 함부르크에서 출발한 오케스트라가, 브람스가 사랑했던 드보르자크의 음악으로 공연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들이 남긴 음악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한다. 완벽한 균형, 그리고 진심 어린 울림.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조슈아 벨이 만들어낸 그 밤의 앙상블은 한 시대의 예술적 대화를 오늘의 감성으로 되살려냈다. 그 울림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마치 함부르크의 바람이 서울의 가을밤을 잠시 스쳐 간 것처럼.

왜 나는 클래식을 듣는가
나는 생각의 자유가 더 필요할 때, 감각을 조금 더 날카롭게 다듬고 싶을 때 클래식을 찾는다. 클래식은 오직 선율로만 내게 말을 건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해석도, 어떤 의미도 미리 정해주지 않는다. 그저 소리가 흐를 뿐이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느낄 자유를 얻는다.
이날 밤, 함부르크와 보헤미아의 바람이 만나 만들어낸 음악은 내게 그런 자유를 다시 한 번 선물했다. 누군가에겐 고독이었을 선율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겐 희망이 되는 그 순간. 그것이 클래식이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
공연장을 나서며, 나는 조금 더 또렷해진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