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 있다. 그냥 좀 넘어가지 않는 사람.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며 구태여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사람 말고, 작은 것이라도 바꾸려 드는 사람. 반항하는 인간이다.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나 밥 퍼거슨 같은 사람. 물론 그 과격함에 있어서 둘은 적잖이 차이 나는 인물이지만, 어찌 됐든 반항하는 인간이다. 최근 개봉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하 PTA)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PTA는 우리 시대에 반항해야 하는 이유를, 반항하는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를 누구보다 처연하게 그려냈다.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는 극 중 반파시스트, 무정부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성 해방, 흑인 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내는 조직, 일명 ‘프렌치 75’의 행동대장이다. 조직원들과 함께 무장하여 이민자들을 구출해 내고, 정치인 사무실을 공격하며 밥과 함께 세상에 소리친다. 엿 먹으라고, 우리는 굴복하지 않을 거라고. 모든 소수와 약자를 존중하고 지켜낼 거라고. 밥 퍼거슨도 프렌치 75의 조직원으로, 폭탄 전문가로 활동하며 퍼피디아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러다 퍼피디아가 출산했고 밥은 아이를 보는 데에, 가족을 지키는 데에 전념한다. 예전처럼 몸 사리지 않고 여기저기 뒤집어엎으러 나가는 퍼피디아는 아이를 팔에 안은 채 ‘자기야 혁명 잘해’라며 한마디 건네는 밥을 소극적이라 여기고 둘의 관계는 여전히, 그러나 더욱 소원해진다.
어떻게 반항해야 할까. 이 영화는 퍼피디아처럼 극단적인 혁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밥 같은 방식도 괜찮다고,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영화다. 은행에 무장 강도로 침입한 퍼피디아가 사람을 쏴 체포되고 조직원들은 위험에 빠져버려, 밥도 급히 신분을 위장하고 아이와 도주하며 둘은 헤어진다.
그 뒤로 밥은 자신과 딸의 안전에 대한 걱정으로 편집증적이고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술과 마약에 찌든, 머리도 자르지 않고 질끈 묶고 오랫동안 빨지 않은 것 같은 셔츠 하나 대충 걸치는 아저씨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혁명가’ 시절의 악역, 스티븐 록조가 다시금 그들의 삶으로 쳐들어와 딸 윌라를 노리자 밥은 자식을 구하려 고군분투한다. 더 이상 옛날의 그 전투적이던 시위대도 폭탄 전문가도 아니고, 암구호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아 허둥지둥, 주변 사람들의 조그맣고 조그만 도움을 받아 연명하듯 딸에게 다다르는 밥을 이 영화는 ‘전쟁 영웅’으로 추대해 준다. 그러니까 사는 게 바빠서, 지킬 게 있어서, 이런저런 일에 치여서 한때는 뭐라도 바꿔보려고 했지만 이젠 그 시절이 전의식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들의 반항 방식을 긍정하는 것이다.
결국 삶의 자리를 되찾은 밥과 윌라는 드디어 핸드폰도 만들고 어둑어둑할 때 외출도 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윌라 안에 있던 반항의 불씨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고, 밥은 그것을 진압하지 않고 타오르도록 놔둔다는 사실이다. 밥이 뜨겁게 주구장창 외치던 혁명은 야속한 세월과 삶의 지난하고 구차한 현장들 때문에 이젠 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옮겨붙던 그 불씨는 기어코 윌라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여기에서 저기로 번질 테다.
꼭 과거에 무력으로 세상에 맞서지 않았더라도 반항하는 인간일 수 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는 동료에게 ‘게이같이 웃지 말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게이 같은 게 뭔데요, 게이면 어때서요. 웃는다고 다 괜찮은 거 아니에요. 재희에게 돌아오는 말은 ‘왜 사소한 거에 목숨 걸고 그러냐’다. 유난이라는 것이다. 재희는 걔한테는 그게 목숨 같나보다, 하라고 소리 지른다. 이런 것도 다 반항이다. 그냥 좀 참고 넘어가라는 사람한테 바른 말 하는 것. 괜찮은 척 웃어넘기는 사람을 대신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옳지 않다고 믿는 일은 가차 없이 그만 두는 것.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아저씨에게 앞에 배지를 단 임산부가 있으니 자리를 양보해 주실 수 있냐고 묻는 것. 분위기 해치지 말고 분란 일으키지 말라며 부당함을 요구받을 때 정의를 지키는 것.
반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살던 대로 사는 거다. 자기가 알던 삶 하나만을 영원히 아는 채로, 두 눈 양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그대로 직진이다. 다른 길과 가능성, 그 안에서 감각할 모든 감정은 모두 배제해 둔 채로. 알베르 카뮈는 우리 세계의 필연적인 부조리에 대응하는 법으로 반항을 꼽았다. 세계는 인간에게 침묵하며 어떠한 의미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나름대로의 방식을 찾아 살아야 한다. 카뮈에게는 그것이 형이상학적 반항이다. 부조리를 깨닫고도 열심히 돌을 굴리는 시지프의 마음으로, 삶 그 자체에 반항하며 ‘매 순간 세계를 재검토’ 하는 일만이 인생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연대다.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부조리한 세계에서 반항하며 연대하는 법을 말했고, PTA가 또한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통해 역설했다. 거창한 사람도 아니고 동네 이웃 주민, 그냥 딸의 태권도 사부가 엄청난 스노우볼이 되어 구출 작전에 힘이 되지 않았는가.
거창하지 않더라도 일단 반항하기만 하면 뭐든 된다. 나중에라도. 한번 더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는 시작된다.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몇마디 말이든, 현장에 뛰쳐드는 것이든. 반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반항해야 산다. 그냥 말고 잘, 반항해야 잘 산다. 반항해야 같이 잘 산다. 삶이 나를 사는게 아니라 내가 삶을 살게 된다. 반항하는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