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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덕질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나의 첫 페스티벌은 팬데믹으로 공연 산업이 암흑기에 빠지기 직전, 2019년 가을에 열린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2019’였다. 그 무렵 나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의 라디오 라이브 클립을 보고 밴드 DAY6에 막 입덕한 참이었고, 그들이 페스티벌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돗자리 가방을 메고 올림픽공원으로 향했다. 가족, 친구, 연인들 사이에 혼자 자리를 잡았고, 좁은 돗자리에 앉아 먹던 스팸김치볶음밥, 색색의 옷을 껴입은 가을 나무들, 보기 좋게 풀어진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붉은 노을과 가을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지던 DAY6의 목소리까지—페스티벌과의 첫 만남은 완벽했다.

 

충청도 한 소도시에 사는 나는 급기야 작년 여름, 덕질을 따라 대구로 페스티벌을 보러 내려갔다. 그날 경상남도에는 비 예보가 있었고, 입장 직후 예보대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분주히 우비를 꺼내 입었지만 아무도 완전히 젖지 않기는 어려워 보였다. 천막 아래 무대는 계속되었고, 차양 있는 좌석에서 가방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닦아내며 나는 곧 스탠딩존으로 향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캡모자 위에 우비 모자를 덧씌우고 계단을 뛰어내려 스탠딩존 무리에 합류했다. 희고 반투명한 우비 뒤통수들 사이로 덩실덩실 움직이고, 토독토독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감촉을 느끼며 그 장면에 젖어들었다. 어쩌면 나는 바로 이런 순간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야외 페스티벌은 누군가를 고상하고 기품 있게 두지 않는다. 때론 비를 피할 수 없고, 기온이 떨어지면 손이 얼어 기타 연주가 어렵기도 하며, 땡볕에 서 있다 보면 멋은커녕 두피를 지키기 위해 모자를 눌러써야 하기도 한다. 그날 나는 자연과 음악 안에서 내가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자꾸 페스티벌에 오게 된다는 걸 느꼈다. 발에 물집이 잡혀 욱신거리는 오른발을 절뚝이며 동대구역으로 돌아가던 길에 생각했다. 덕질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여행에는 큰 흥미가 없는 나지만,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늘 덕질이었다. 덕질 덕분에 나는 ‘가는 사람’이 되고, ‘하는 사람’이 된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은 단지 가수를 보러 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그 자리에 도착한 사람들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고, 덕질은 그 마음으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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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덕질이 나를 인천 영종도로 이끌었다. 홍대 음악의 성지 ‘롤링홀’이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에 양일 참석했다. 인천의 넓은 부지를 활용한 총 5개의 스테이지는 단순한 실내외의 구분을 넘어 각 스테이지마다 구조와 분위기가 뚜렷하게 달라, 모든 공연장을 경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라이브 바 같은 느낌의 무대부터, 홍대 소극장을 닮은 공간, 그리고 사람이 적을 때면 뒷골목처럼 피로를 피해 들어가던 브리즈 스테이지, 그리고 피크닉존과 스탠딩존이 넓게 펼쳐진 플래닛 스테이지까지, 구성은 알차고 다양했다.

 

의미 있는 자리인 만큼, 라인업 또한 화려했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양일에 걸쳐 무대를 채웠고, 그중에서도 류수정의 무대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1일차는 공연 취소가 우려될 정도로 강한 비바람 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 예보는 빗나갔고 나는 우비와 여분의 신발까지 한가득 챙겨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인천을 누볐다. 흐린 하늘에 쾌청한 가을 햇살을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브리즈 스테이지에 오른 류수정의 무대는 그 아쉬움을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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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 타이틀 ‘NEW CAR’로 시작된 무대는 어느덧 ‘비바람’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오늘 조금은 비가 오길 바랐다”고 말한 뒤 노래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해 향수도 뿌리고 새 신을 신었지만, 비가 오고 한강 물은 넘치고 신발이 젖는다는 귀엽고 풋풋한 감성의 곡이었다. 그녀의 뒤로는 먹구름이 끼고 비행기가 낮게 날며 지나가고, 스테이지 이름을 따라 산들바람처럼 흩어지는 살풋한 목소리는 흐린 날씨마저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었다. ‘모든 게 다 젖어도 좋아, 함께 뛰어들어가’라는 마지막 가사로 마무리된 이 무대는 ‘언젠가 야외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이 곡을 듣고 싶다’는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남겼다.

 

류수정은 2014년 러블리즈로 데뷔한 이후, 8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2022년 독립 레이블을 세워 홀로서기에 나섰다. 옥빛 원피스에 푸른빛 일렉기타를 메고, 인이어 대신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그녀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그녀답고 단단해 보였다. ‘White Dress’, ‘Beautiful’ 같은 곡으로 자존감과 자기 확신을 전하고, 자기 목소리를 자신 있게 들려주는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다. 어느새 무대는 막바지였고, 객석은 점점 관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특별한 합동무대, 엑디즈xY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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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P의 밴드 엑스디너리 히어로즈(엑디즈)는 양일 모두 무대에 올랐다. 특히 ‘롤링홀 30주년’이라는 기념비적 페스티벌답게, 사플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라인업을 구성했고, 그 상징처럼 서브 헤드라이너와 헤드라이너의 합동 무대가 인상 깊었다. 1일차는 엑디즈와 YB가, 2일차는 우즈와 체리필터가 함께 무대를 꾸몄고, 25년을 넘나드는 세대의 호흡이 만들어낸 순간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특별한 장면 중 하나였다.

 

내가 대구에 이어 인천까지 오게 된 이유 역시 엑디즈였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약 20회 가까운 페스티벌과 단독 공연을 관람했다. 엑디즈는 작년, 매달 싱글을 발매하고 매달 YES24 라이브홀에서 콘서트를 열 만큼 라이브에 강한 팀이다. 특히 멤버 주연은 데뷔 첫 페스티벌 무대에서 찍힌 팬 직캠으로 ‘스베케 장발 걔’로 입소문을 탔고, 나 역시 어느 한여름 야외 페스티벌에서 자연광 아래 반짝이는 그의 금발 땀방울에 입덕한 사람이다. 페스티벌은 분명한 기회였다.

 

이틀간의 공연에서 엑디즈는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인지도를 쌓은 곡들은 과감히 빼고, 대신 하드록과 메탈, 락오페라의 문법이 살아있는 셋리스트를 선보였다. YB의 윤도현이 피처링한 ‘Instead’, 강렬한 ‘Diamond’, 가장 최신곡인 ‘Fire’로 무대를 마무리하며 확실한 정체성과 성장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페스티벌 장엔 나름의 유행도 있었다. 빼놓을 수 없는 김말국, 깃발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슬램존, 그리고 옷과 패션 소품을 통한 각자의 표현들까지. 사람들은 ‘오늘의 나’를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떤 이는 사운드플래닛 MD 반다나를, 또 어떤 이는 다른 페스티벌 티셔츠를 입거나, 직접 만든 슬로건 깃발을 들고 오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자신이 누구의 팬인지,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표현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같은 공간에 있는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는 신호이기도 했다.

 

즉 페스티벌은 소속감과 자기 표현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같은 가수의 팬, 노래를 아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겹치고, 동시에 각자의 가방에 다른 키링과 뱃지을 달고 각양각색의 슬로건을 단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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