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시작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연극 <플리백(Fleabag)>이 한국 무대에 올랐다. 세계 최초 공식 라이선스 공연으로 선보이는 이번 한국 초연은 오는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관객을 만난다.
<플리백>은 현대인의 고독과 자기파괴적인 욕망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여성 1인극이다. 2013년 초연 당시 에든버러 프린지 신작상과 더 스테이지 베스트 1인 공연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고, 이후 런던과 뉴욕 무대를 거쳐 세계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는 2024년 국립극장 엔톡 라이브 플러스를 통해 소개되며 이미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플리백>엔 화려한 무대 장치도, 여러 명의 배우도 없다.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 1인 독백극이라는 형식이지만,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그런 걱정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분명 무대 위에는 한 명뿐인데 이상하게도 무대가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감정으로 공간 전체가 가득 찼다.
그 몰입을 완성하는 데엔 연기자의 힘이 결정적이다. 주연 배우 3인(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은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물과 상황을 오간다. 목소리와 표정, 몸짓의 작은 변화만으로 인물을 구분하고, 때로는 관객을 향해 직접 말을 걸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떤 순간은 19금 스탠드업 코미디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할 정도다. 필자의 관람 당일은 김규남 배우가 연기를 펼쳤다. 때로는 능청스럽고 때로는 뻔뻔하게, 또 어느 순간에는 예상하지 못한 깊이의 감정을 꺼내 보이며 관객을 주인공의 세계관으로 끌어들이는 차력쇼를 선보였는데 그 자체로도 몹시 인상적인 무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플리백>이 흥미로운 것은, 무거운 이야기를 결코 무겁게만 풀어내지 않는 이야기 전개에 있다.
주인공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실수와 충동적인 선택이 반복되고, 가족관계는 삐걱거리며, 마음 한편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공허가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낸다. 성적인 농담과 냉소적인 말투,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 이어지면서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참을 웃고 난 뒤에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플리백>의 블랙코미디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웃음과 슬픔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지 않다는 것에 있다. 웃긴 장면 안에 외로움이 있고, 우스꽝스러운 행동 뒤에는 상처가 있다. 관객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의 대상이 단순히 ‘엉망인 한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슬픔을 슬픔의 얼굴로만 보여주는 대신, 그 안에서 웃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웃게 만든 뒤, 그 웃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웃음과 눈물을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우린 가장 힘든 순간에 농담을 하고, 너무 속상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순간도 있다.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조금 비틀어 바라볼 때 비로소 그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플리백>의 웃음은 현실을 가볍게 만드는 웃음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한 웃음에 가깝다. 그리고 그 웃음이 오래 남는 이유는 결국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때로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고,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돌이키고 싶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 일을 계속해서 되짚으며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것이 바로 연필 뒤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
작품을 보고 난 뒤 유독 오래 마음에 남은 대사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 괜찮다’는 말은 때로 너무 쉽게 소비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매번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실수한 뒤의 죄책감과 그 실수로 인해 달라진 관계를 알고, 때로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까지 알고 있다. 지나간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지워진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플리백>이 관객에게 건네는 위로는 그 정도의 것이 아닐까 싶다.
좋은 예술은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한다. <플리백>이 보여주는 불편한 간극 역시 그런 지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를 보며 쉽게 웃고, 때로는 누군가의 서툰 모습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웃음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타인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 역시 실수하고, 때로는 엉망이 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꽤나 웃었는데 마음은 묵직했고, 누군가의 엉망인 삶을 들여다봤는데 이상하게도 나 자신을 조금 더 마주하게 됐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 발칙한 1인극을 무대에서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