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슈게이즈(Shoegaze)는 노이즈에 잠식된 사운드만큼이나 항상 주류 아래에 있었던 음악이다. 장르의 전성기를 이끈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Loveless
한편 모든 음악이 그렇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슈게이즈 역시 변화를 거듭해왔다. 주목할 만한 점은, 슈게이즈의 진화가 더 이상 ‘남몰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대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슈게이즈의 영향을 짙게 받은 인디 아티스트들이 등장했다. 이 움직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라면, 슈게이즈 특유의 몽환적인 사운드 아래 Z세대의 문화와 미적 감성 취향을 더해 ‘튀는’무언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빈 스텔라(Been Stellar), 위르(Whirr), 그리고 올해 코첼라 무대에 오른 위스프(Wisp) 등이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떠올랐고 이들 음악은 2023년, 유튜브 음악미디어 ‘NEOPUNKFM'에 의해 Z세대를 의미하는 ‘Zoomer’와 슈게이즈의 ‘gaze’가 합쳐져 줌머게이즈(Zoomergaze)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 움직임에서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파란노을, 브로큰티스 등은 헤비 리스너 중심의 레이트 유어 뮤직(Rate Your Music) 차트에서 장르 상위권에 위치하며 2020년대 초반 전 세계 매니아층 사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지금, 스키틀즈, 신타펑크, 잔류파, 랜딩기어 등 데뷔 1~2년 차 밴드들 중심으로 슈게이즈를 다채롭게 펼쳐내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들 중 가장 뜨거운 팀이라면 지난 9월 17일 정규앨범

밴드 스키틀즈(Skittles). 왼쪽부터 나모(기타), 유주(신디사이저), 세돈(보컬, 기타), 은하(베이스)
스키틀즈는 홍대 공연 마니아라면 한번 쯤 접해보는 이름이다. 슈게이즈를 비롯 사이키델릭, 펑크(Punk)의 언어가 뒤섞인 음악을 선보이는 팀으로, 최근 ‘블록파티 페스티벌(Block Party Music and Arts Festival 2025)’에 출연해 폭발적인 라이브를 펼치는 등 화제 넘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운 좋게도,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밴드이기도 한 이들을 9월의 어느 비 오는 날 밤, 망원동 소재의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반갑습니다. 팀명이 스키틀즈(Skittles)인 이유를 먼저 여쭤봅니다.
세돈: 어감이 좋았어요. 여러분이 흔히 아시는 ‘그 사탕’과는 전혀 관계없이요. (웃음) 예전엔 지금의 볼링에서 핀 하나가 없는 ‘스키틀즈’라는 게임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게임을 즐기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스키틀즈가 금지가 되었대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핀 하나를 더해서 합법적으로 한다!” 이렇게 되어서 볼링의 역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제가 밴드를 만든다면 진지하고, 근엄한 느낌보다는 가벼운 무언가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하나가 더하거나 빠지거나… 약간 나사가 빠진 듯한 의미가 좋아요.
은하: 저렇게 심오한 뜻인 줄 몰랐어(웃음)
*스키틀즈는 9개의 나무 핀을 사용하던 중세~근대 유럽의 전통 게임이다. 잉글랜드와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인기가 많았으며, 수도사들도 즐길 정도로 대중적인 놀이였다. 이런 스키틀즈가 이민자들을 따라 미국에도 전파되었는데, 당시 미국 여러 주에서 9핀 볼링이 도박과 관련되었다며 금지령을 선포했다. 게임을 계속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핀을 하나 더 추가해 10핀으로 바꾸면서 새로운 게임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볼링의 시작이다.
팀의 시작은 어땠나요?
유주: 23년 말에 제가 합류했어요. 그때부터 이제 좀 밴드의 형태를 갖추게 됐고, 저희들끼리는 첫 공연 날.. 2024년 1월 20일을 공식적인 데뷔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세돈: 신촌에 긱 라이브 하우스였어요. 직장인 밴드분들이랑 했었죠.
지금의 멤버들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 결성 비하인드를 들려주세요.
세돈: 갑작스레 재즈 아카데미에서 엔지니어링 수업을 받았었는데, 그때 유주, 은하를 만났어요.
유주: 저는 세돈이가 듣던 그 수업에 연주 조교로 들어갔었죠.
세돈: 둘이 교환 레슨을 하기로 했어요. 저는 누나한테 베이스를 알려주고, 누나는 제게 코드를 알려줬어요. 그러다 밴드를 같이 하자고 운을 뗐죠. 신디사이저가 필요했거든요.
유주: 그때 바로 대답을 못했어요. 일주일 지나고 답을 줬던 것 같아요. 그렇게 레슨은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고... 신디사이저는 완전 처음이었어요. 부딪히면서 배웠어요.
세돈: 그리고 은하는 그 아카데미에서 공연하는 걸 봤는데 베이스 치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그래서 따로 만나기도 했었고요. 마침 나모형이 기타를 잡게 되면서 베이스가 공석이었거든요.
은하: 납치를 당했죠. 거의 일방적으로.
나모: 아는 친구랑 어느 날 커피를 한잔 했는데, 그때 이 팀 공연 초대를 받고 그 다음 주에 공연장에 갔어요. 거기서 우리 세돈이를 처음 만났는데 덥석 악수를 청하면서, “저희 밴드에서 베이스 치신다고” 이러던… 그날 이제 공연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같이 술 먹고 신나서.. 네. 그렇게 멤버가 됐답니다. 원래 전공은 기타였어요. 작년 9월까지 베이스를 치다가, 지금 기타로 자리를 옮겼죠.
그럼 원래 좋아하시는 음악이나, 하고 싶었던 음악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세돈: 원래는 펑크(Punk)를 하고 싶었어요. 애초에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게 스케이트 펑크* 같은 걸 하고 싶어서였으니까요. 그러다 갑자기 나로틱(Narotic)이라는 팀에 들어가면서 슈게이즈와 사이키델릭의 세계를 알아버렸죠. 그때부터 제가 좋아하던 펑크 느낌을 슈게이즈랑 결합해서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일렉트로닉도 많이 들어요. 정규를 만들면서 락킹한 사운드에 좀 지친 것 같아요. 그래서 다양한 음악들을 찾아서 듣고 있어요.
*스케이트 펑크(Skate Punk): 미국 서부의 하드코어 펑크 신에서 파생된 장르다. 지금의 팝-펑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초기 오프스프링, 그린데이의 사운드도 스케이트 펑크 범주 안에 있다.
유주: 중학생 때 배우던 피아노를 한동안 끊고 있었는데, 제가 공부를 하나도 안 하니까 어머니께서 “너 진짜 하고 싶은 게 뭐냐” 물으셨어요.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피아노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때부터 음악을 시작했죠.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졸업을 했는데, 대학원을 가기보단 다른 걸 너무 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2~3년 동안 버클리 입시를 목표로 재즈를 배우면서 좋은 음악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원래 관심도 없었던 스티비 원더나, 자미로콰이라든지..
‘세상에 진짜 다양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구나’ 생각하던 찰나에 세돈이한테 연락이 온 거죠.
은하: 저는 지금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따로 활동하고 있는데, 스키틀즈랑은 완전 다른 음악이죠. 장필순 선생님을 엄청 좋아하고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이스는 제가 4년 전에 시작했는데, 작곡을 배우러 재즈 아카데미에 갔다가, 여기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앙상블 수업이 있더라고요. 작ㆍ편곡을 배우는 분들은 자기가 자신 있는 악기를 고를 수 있었는데 저는 뭘 쳐야 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무슨 악기를 치고 싶냐고 선생님께서 여쭤보시길래, “그냥 남는 악기 주세요” 했다가 베이스를 시작하게 됐어요.
전에 슈게이징이나, 이런 장르들을 접해보신 적은 있으세요?
나모: 아예 없었어요.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죠.
유주: 과거의 스키틀즈는 지금보다 훨씬 더 펑크스럽고, 개구쟁이 같은 느낌이었어요. 중간중간 멤버 교체도 있었고, 음악적 방향성도 조금씩 변화를 겪으면서 지금의 스키틀즈가 되었어요.
세돈: 그땐 곡들이 완전 다 달랐어요. 각자의 취향대로, 진짜 ‘그 사탕’처럼 알록달록한 맛이 나요. 정규를 만들면서 어느 정도 통일감이 생겼달까요.
나모: 어느 날 ‘Penny’라는 곡을 편곡 하려다가 슈게이즈 버전을 시도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에비로드 합주실에서요.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돈: 엄청 오래된 곡인데, 당시에 교제하던 친구랑 관계가 원만치 않을 때 썼던 곡이예요. 한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곡이 술술 써지더라고요. ‘Penny’ 이전에는 곡을 완성하는 걸 두려워했었어요. 작업 속도에 불이 붙게 된 기점이었죠 어떻게 보면.
유주: ‘Penny’는 서툴지만 신기했어요. 이 친구(세돈)는 실용음악과에서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친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독특한 게 나오고 있는 거예요. 사실 배운 사람들은 머릿속에 붙여져 있는 어떤 이미지가 있는데, 그걸 탈피하려면 다시 돌아가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거든요. 내가 할 수 없는 걸 세돈이가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곡의 초기 버전이 신기하고, 또 멋져 보였어요. ‘얘랑 하면 재밌는 건 많이 해볼 수 있겠다.’라는 믿음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영감은 보통 어디서 얻으시나요? 스키틀즈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세돈: 매일 하더라도, 어떤 ‘필(Feel)’이 올 때가 있거든요. 7일 내내 작업해도 안 나오던 곡이, 갑자기 술술 나오는 날이 있어요. 그걸 몇 시간이고 붙잡는거죠. 그렇게 스케치해서 저희 단톡방에 공유를 하고, 그 이후에 합주도 거치면서 발전시켜나가는 편이에요.
나모: 한 곡이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는 편이에요. 데모 버전을 무대에 올릴 정도로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요. 무대에 막상 올리고 나서도 수정을 많이 거치기도 하고요.
세돈: 사실 신곡 작업을 오랫동안 못했어요. 작년 10월~ 11월부터 정규앨범 작업을 해왔으니까요.
3장의 싱글 이후, EP가 아니라 바로 정규 발매를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세돈: 정리를 좀 하고 싶었어요. 20대에 썼던, 우리가 20대에 만들었던 곡들을 한 번에 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정규 앨범을 낸다는 건 밴드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도 비로소 아티스트의 길을 걷게 되는 것 같아요. 퍼포머를 넘어서, 진짜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유주: 마라토너가 되기 위한 여정인 것 같아서 되게 재밌었어요. 싱글 3개가 10km였다면, 정규는 마라톤 풀코스 같은 거죠.
세돈: 아뇨, 제 생각엔 싱글은 5km였던 것 같아요.(웃음)
나모: 대단한 거지.. 5km 뛰던 사람이 한 번에 풀코스 뛰려고 그러면.. 뭔가 저는 그래요. 죽을 때까지 가져갈 추억이 하나 생긴 것 같아서.. 저희 멤버들이 사람들이 다 좋거든요. 우연히도 이런 사람들이랑 모여서 정규앨범까지 만들게 됐다는 게 벅차기도 하고, 좀 감동적인 일인 것 같아요. 내 생에 이런 좋은 일도 일어나는구나…
은하: 혼자서 절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멤버들 덕분에 하게 됐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앨범이라는 결과물을 내는 것도 그렇고, 공연을 잡고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요. 함께여서 좋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정규 1집 Escaping from the bubblegum, 어떤 앨범인가요?
세돈: 일단 제목에서 느끼실 수도 있지만 풍선껌 하면 유치함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 같거든요. 저희 학창 시절에 와O 풍선껌 이런 것들 자주 사먹었잖아요. 그런 어렸을 때, 어린 무언가에서 탈출하자는 내용이에요.
유주: 저희 앨범 표지를 보시면, 어딘가 깨부숴진 것처럼 보여요. 갇힌 공간 안에서 그걸 깨부수고 밖으로 탈피하는 느낌이랄까요. 앨범이 전반적으로 청춘의 방황 같은 것들이 담겨있는데, 저희가 벗어나고자 하는 틀이 풍선껌인거죠.
세돈: 주제랑 곡들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좋아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20대 초반부터 쭉 써온 곡들을 한번에 정리해서 내는 앨범이었는데, 제가 힘들었을 때 썼던 곡들을 다시 보면 내가 너무 철딱서니 없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부터 딱 만들고, 그 자리에서 ‘Escaping from the bubblegum’ 을 만들었어요. 그게 이렇게 앨범 제목이 돼버렸네요.

'Escaping from the bubblegum' 표지
앨범 준비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세돈: 인디라는게 참.. 초반 중반에는 면밀하게 신경을 쓰다가도 뒤로 갈수록 다들 지치게 되잖아요. 착오가 좀 있어서 피지컬 앨범 인레이가 뒤집혀서 나왔어요. 덕분에 앨범을 예정보다 많이 뽑았죠(웃음)
유주: 아마 ’Unknown’이었던 것 같아요. 신스 녹음을 해야 하는데 세돈이가 사운드가 부족하다고 이펙터를 추가로 연결했어요. 그런데 제가 손이 부족하더라고요. 전 양손으로 연주를 하고, 세돈이가 옆에서 손 하나를 더해서.. 손이 세 개 네 개가 있어(웃음)
나모: 전 녹음이 즐겁지는 않았어요. 좀 고통스러웠는데, 당연히 고통스러워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전 보통 곡당 천 테이크 정도 하거든요. 실용음악 전공이다 보니, 평생 정제되고, 완벽한 연주를 추구했는데 이번엔 그걸 하기 싫은 거예요. 개성 있는 트랙들을 최대한 많이 뽑고, 그중에서 정성이 담긴 것들을 쓰는 순서로 하다 보니.. 아마 정규 하면서 만 테이크는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은하: ‘Pond’라는 곡에 제 솔로가 나오는데요. 스튜디오에서 처음 녹음을 했다가 세돈이가 “네 솔로에 진심이 없어”라고.. 솔로에 대해서 끝없는 피드백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걸 다 적용시키려고 하다 보니 멤버들한테 화가 많이.. (중략) 화가 나서 원테이크로 녹음한 게 채택이 됐어요. 뭔가를 만들면서 압박이 없을 수는 없구나. 누군가 나를 압박하는 것도 필요할 수도 있겠다. 이런 점들을 배웠던 것 같아요.
세돈: ‘Snap’이란 곡을 원래 정규에 넣으려고 했거든요. 그 대신에 ‘Pond’를 마지막으로 넣었는데 약간 조커 카드 같이 삽입한 것 같아요. 저는 이 곡이 지금 너무 좋아요. 꼭 들어보세요.
애정이 가는 트랙이 더 있다면요?
나모: ‘Escaping from the bubblegum’이요. 이 곡이 없었다면 지금의 스키틀즈는 없었을 것 같아요. ‘버블검’ 이후부터 저희 방향성이 좀 잡혔다고 생각하거든요. 스키틀즈의 정체성이 담긴 곡이 아닌가 싶어요..
스키틀즈의 음악을 들었을 때, 청자들이 어떤 이미지를 그렸으면 좋겠다 생각하시는 게 있는지?
세돈: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어요.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리프들이 꽤 많은데, 반복 속에서 뒤틀림 같은 게 느껴지실 거예요. 저조차도 가끔 ‘여기서 이런 게 있었나?‘하는 부분들이 계속 들리거든요. 그런 것들을 찾아가면서 들으면 더 쾌감이 느껴지는 앨범 같아요.
유주: 저희 팬분 중 한 분이 ‘Never Turn Back’이라는 곡을 공연에서 듣고 좋은 울림을 받았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처음엔 우리 음악이 사람들에게 생소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했었는데, 어떤 팬분들은 사운드클라우드에서 가사를 찾아보시곤 ‘나 같다‘고 생각을 하셨더라고요. 이렇게 곡마다 듣는 사람들에게 거창한 감동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음악이었으면 좋겠어요.
세돈: 기타로 절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서로 다른 노이즈들이 하나로 융합될 때의 사이키델릭함이 있거든요. 연주를 할 때 스스로 내면에 잠식당한 듯이 연주하거든요. 내면에 잠식이 되고, 그게 제 본모습으로 투영이 됐을 때의 감정이 좋더라고요. 저희 음악을 들으실 때도 어지러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
사이키델릭이 뭘까요? 저도 참 설명하기 어려운 용어인데요.
세돈: 서로 다른 자아가 섞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그냥 자기 ‘쪼’대로 한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하는데, 하나로 융합이 됐을 때 그런 게 특이한 게 나오거죠. 그게 신기한 것 같아요.
유주: 정신으로서의 사이키델릭이 있고, 사운드로서의 사이키델릭도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 아직까지도 전 의구심이 풀리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저희가 LSD 같은 약물 체험을 해보지 않으면 영영 사이키델릭을 이해 못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었고요. 또 비틀즈라든지, 이런 밴드들의 사운드나 음악을 가져오면 사이키델릭이 되는 건가라는 생각도 오래 했었고요.
일단 저희는 플랜저(Flanger)나, 패닝을 극단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사이키델릭을 표현하고자 해요.
세돈: 요즘에는 이펙터가 잘 나와서 모듈레이션 계열 이펙터를 적극적으로 쓰면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금방 구현이 되잖아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레이트풀 데드(Greatful Dead)라는 팀은 그런 이펙트를 일절 사용하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충분한 사이키델릭이 표현되는 게 신기한 것 같아요. 잠시만, 지금 어떤 질문이었죠?(웃음)
음악이 공개되고 나서, 많은 분들께서 들으시고 스키틀즈 음악은 뭐다, 이렇게 정의를 내려주시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줌머게이즈라는 분류도 그렇고요.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면, 장르를 정해두고 음악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아요.
세돈: 저는 듣는 사람과, 상황에 의해 장르가 규정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반응이 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죠.
나모: 누군가가 저희 노래를 듣고 어떤 장르를 떠올렸다면, 그 장르가 그 사람한테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장르를 구분하는 것 자체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 것 같아요.
유주: 실제로 앨범을 쭉 들으시면 12곡이 다 성향이 다른데 또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어요. 사람 성격도 계속 바뀌잖아요. 나중에 저희가 이런 장르를 계속 갖고 가지 않을 수도 있겠죠. 앞으로 장르적 제한은 딱히 두지 않고 활동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좋은 음악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각자의 기준이 있나요?
세돈: 제가 디깅을 정말 많이 하는데요, 저는 세상에 안좋은 음악은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좋은 음악은 그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 같은거죠. 자기가 뭘 듣고 자라났는지에 따라 귀에 익은 음악들이 다르잖아요.
유주: 어릴 적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때 많이 좋아해 주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 했었어요. 듣기에 좋으면, 그게 좋은 음악이 아닐까 했었는데 이제는 뭔가를 생각하고,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음악이 좋은 음악인 것 같아요.
나모: 제 생각에 좋은 음악은 연주자 입장이랑 청자 입장이랑 좀 다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제가 연주자니까, 연주자 입장에서 좋은 음악은 태도가 건강한 음악, 그러니까 최선을 다한 것. 어차피 똑같은 연주가 매번 안나오잖아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 연주가 음원으로도 나와야 하고, 라이브로도 나와야 하고… 그런 게 좋은 음악이 아닌가 싶어요.
은하: 저도 조금 비슷한 것 같아요. 좋은 태도를 가지고 만들어야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태도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고, 그게 좋은 음악을 만든다고 믿어요.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열심히 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태도가 전부인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중요한 것 같아요.
나모: 진짜 그런 것 같아요. 테크닉은 좀 단발적이랄까요. 한 번 '와' 하는 것과 나중에 다시 듣고 싶은 것들이 다르더라고요.
유주: 그래서 클래식 뮤지션들도 10대 20대 때 테크니션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감정을 더 잘 싣게 되잖아요. 그렇게 후기작들이 초기작들 보다 더 잘 팔리고, 사람들이 더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것들을 보면, 듣는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아요.
*
라이브 이야기도 해볼까요. 앨범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데도, 라이브를 쉬는 텀이 없으셨어요.
세돈: 사실 최소한으로 줄인 거예요.
유주: 정규를 내면 더 기회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정중히 계속 연락을 드렸었어요. 아예 중단하면 팬분들과 소통할 창구가 하나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세돈: 최소한으로 라이브를 하면서도, 결이 맞는 팀들을 찾고 싶었어요. 멋진 팀들이 정말 많지만 (음악이) 맞는 팀을 만나는 건 어렵거든요.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 같고, 또 공연이 끝나면 그날은 스키틀즈 내부의 파티잖아요. 원래 저희가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앨범 만들면서부터는 거의 못했어요.
유주: 밴드 내에서의 친목도 중요하니까요. 얘기도 좀 나누면서 “그때 그랬다, 미안했다” 이런 식으로 한 번 풀고 지나가죠. 다들 싸우잖아요.
코너 속의 코너 같은 느낌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라이브가 있으신지?
나모: 통영인 것 같아요. 통영 프린지 페스티벌 2일 차가 기억에 남아요.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저희 공연할 때 비가 와서 무대 앞으로 못 나가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중간에 비가 딱 멈춘 거예요.
유주: 관객분들도 날씨 때문에 다들 우비 쓰고 앉아계시고, 무대 절반이 천막이어서 저희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무대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청춘 박살’ 2절이 시작할 때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천지창조처럼 하늘이 열렸어요. 구름이 걷히면서 햇빛이 이렇게 들어오는 거예요.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때 약간 좀 소름이 돋았어요.
마지막으로 스키틀즈의 활동 계획, 그리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세돈: 저는 정규를 냈다고 해서 안주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번 연도의 목표는 사실상 끝났어요. 앞으로 공연을 위주로 활동하겠지만 준비를 다시 해야겠죠. 곡을 좀 틈틈이 쓰고, 다시 싱글이나 EP를 낼 생각부터 하고 있어요. 앨범 작업이 끝난 순간부터 약간의 공허함을 좀 느끼기 시작해서..
세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유주: 뮤지션은 죽어서 앨범을 남긴다.
저흰 지금처럼 꾸준히 공연을 돌면서 관객분들이랑 같이 호흡할 예정인데요. 저희 음악을 듣고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어릴 적부터 우유니에 있는 소금사막에 너무 가보고 싶었는데, 거기서 스키틀즈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게 꿈입니다.
은하: 해외에 투어를 가거나,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고 싶다. TV에 나오고 싶다..
세돈: 스키틀즈라는 이름이 2200년까지, 3천년까지도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모: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은 다시 하라고 해도 못할 정도로, 그냥 후회 없이 연주했거든요. 정성과 사랑과 애정이 듬뿍 담긴, 일종의 오마카세랄까.
꼭 맛좀 보시라,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
앨범은 아티스트가 세상에 말을 거는 가장 고결한 수단이다.
올해 초, 음악계 최고의 펀치라인은 2025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밴드 ‘단편선 순간들’이 남긴 수상소감 "싱글은 앨범이 아니다"였다. 이 발언의 요점은 싱글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다. 싱글과 앨범은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앨범은 통상적으로 최소 8곡 이상, 3~40분 이상의 러닝타임으로 구성된다. 28곡이 수록된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3집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비평가들이 아티스트를 앨범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돈에게 정규 앨범이 '아티스트로서의 첫 발'이었던 것처럼, 음악인들의 커리어를 논할 때 ‘정규 앨범이 있는가, 몇 장이나 냈는가’ 등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스키틀즈는 이제 시작이다. 대장정의 첫걸음을 뗀 밴드에게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앞서 줌머게이즈(Zoomergaze)에 대한 언급을 했었다. 슈게이즈는 과거에도, 물론 지금도 아는 사람만 아는 음악이다. 탄생 초기부터 ‘신발만 쳐다보는 공연자’, ’불친절한 음악’이라는 이미지는 여전히 유효한데, 여기저기서 '슈게이즈'라는 용어가 등장하니 오랜 장르 팬들에게는 이 상황이 낯설지도 모른다.
사실 줌머게이즈는 음악 장르라기보단 하나의 문화현상에 가깝다. 현대 사회는 분류하고,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덕분에 점점 얼어붙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감정적이다. 언제나처럼 과도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갈수록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어 두꺼운 이불을 덮고 소리쳐본 경험이 있는가. 슈게이즈가 선사하는 노이즈의 파도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기 충분하다. ‘왜 지금, 슈게이즈인가?’라고 묻는다면, 시대가 슈게이즈를 불러낸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슈게이즈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젊은 밴드들을 주목해야 할 이유 또한 명확하다. 이들 중 누구도 ‘정통 슈게이즈‘사운드를 구현하는 팀은 개인적으로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슈게이즈의 정서만큼은 확실하게 전달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스키틀즈 음악의 흥미로운 점은 곡마다 기타, 혹은 베이스 솔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큰 볼륨과 함께 좌우로 움직이는 신디사이저 사운드 역시 인상적이다. 장르 특성상 악기의 솔로 플레이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감히 추측컨대, 밴드는 솔로잉을 ‘어지러움’을 배가 시키는데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사운드가 흐릿하게 움직이면서 몽환을 표현하는 게 아닌, 사운드가 들쭉날쭉한 가운데 몽환을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밴드는 “어지러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다소 난해한 설명을 남겼다. 만약 이들의 음악을 듣고, 정신없는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면.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풍선껌으로부터 탈출하셨습니다." -스키틀즈-
*
<에디터 추천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