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간도 아직까지 완전히 자기 자신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그것이 되어보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혹자는 둔하고 혹자는 분명하게.
혈액형별 성격, MBTI, TCI 기질 검사, 심리 테스트 등등. 사람들은 갖가지 테스트를 통해 누군가로부터, 혹은 무언가로부터 자신에 대해 진단받기를 원한다. 이미 어느정도는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 항상 목메여 살아가고 있다. 왜일까. 지금의 나로는 만족스럽지 않아서일까? 왜 '나'에 대한 질문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을까?
나는 대체 누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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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데미안>은 제목이 등장인물을 지칭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화자인 싱클레어다. 마치 <도라에몽> 만화의 주인공이 진구인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싱클레어는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소년이다. 그 나이대 소년들이 그러하듯, 싱클레어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담하고, ‘너희들은 쉽게 하지 못 하는 일을 나는 해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뒷집 과일나무의 열매를 훔쳤다는 거짓 영웅담을 꾸며냈다.
집에 가는 길, 친구들 무리에 있던 크로머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싱클레어를 부른다. 싱클레어의 뒷집 이웃이 정말로 과일을 도둑 맞아 범인을 잡아오는 사람에게 사례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하지도 않은 짓에 범인으로 몰리게 된 싱클레어는 덜미를 주게 되었고, 크로머는 그렇게 싱클레어를 협박하며 돈을 갈취해갔다.
싱클레어는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고뇌를 하게 되었다. 자신은 정말 도둑질을 하지 않았는데, 기정사실화된 바람에 매일 크로머에게 돈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만 이를 부모님께 밝힐 용기는 없었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영웅담이 거짓이라는 걸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악순환이 지속되던 가운데, 그 고통을 끊어줄 사람이 싱클레어의 학교에 전학을 온다.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년이.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한두 학년 위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리만큼 어른스러웠다. 생김새부터 하는 행동, 말하는 것까지 전부 다. 데미안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처럼 -정확히 어떤 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로머로부터 그를 도와준다. 더 이상 크로머는 그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딘가 갇혀 있는 듯한 자신과는 다르게 개방적이고 생각이 트여있는 모습에 점차 데미안에게 매료되어 갔다. 데미안을 만나면서부터 자신이 좀 더 성숙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데미안을 만나기 전과 후, 싱클레어의 삶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내가 읽은 <데미안>은 번역가 전혜린의 타계 60주기를 기념해 그녀의 번역을 되살린 복원본이다. 외래어 표기와 맞춤법, 오기, 띄어쓰기 등을 제외하고 생전 그녀가 번역한 내용을 그대로 되살렸다. 그녀가 번역한 <데미안>은 국내 최초의 유학파 여성 독문학자의, 한국 최초의 독일어 원문 번역본인 것이다.
독일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에 가깝다 보니, 의역도 많지 않아 읽기에 다소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 것이 진정한 <데미안>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글이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지만, 작가와 번역가가 이렇게 글을 쓰고 번역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심연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심연으로부터의 시도며 기획인 각자는 각기의 목적을 지향해 노력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해석은 각자가 각자에 관해서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완벽한 히어로이자 먼치킨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다시금 읽게 되니 그 느낌이 달랐다. 데미안은 그보다 더 깊고 심오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 책을 10년 뒤에 다시 읽게 된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어린 왕자>를 10살, 20살, 30살에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초반 데미안은 지극히 평범한 소년인 싱클레어의 자아 형성 보조자로 나타난다. 한때 SNS 상에서 '1가구 1에릭남'이라는 밈이 유행인 적이 있었다. 여자에게 잘 해주고 집안일도 잘 하는 에릭남을 한 집당 하나씩 보급하자는 유머였다. 이와 비슷하게 모든 청소년에게 그가 한 명씩 옆에 있었다면, 1청소년 1데미안이었다면 어떻게 자랄까. 그래도 삐딱선을 타지 않고 좀 잘 자라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은, 이미 모든 청소년에게는 데미안이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데미안은 우리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니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자화상. 싱클레어의, 모든 독자의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으로부터 받은 도움도 어쩌면 그가 직접 스스로 해결한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저 나를 감싸고 있는 알을 깨고 나올 용기가 아직은 없을 뿐.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자연의 섭리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해 최대치를 이해했단 의미로도 보인다. '나'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했다는 관념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입했을 때, 이를 죽음으로써 이뤄내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웠다. 싱클레어는 고뇌의 고뇌를 거듭하다 결국 숨을 거두는 순간에 데미안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인간상에 대해 깨달았다. 이는 마치 -그런 의도가 아님에도-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만 알을 깨고 나갈 수 있다고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인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기 전에 더 많이 알 수 있다면 참 좋았을텐데.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니 주어진 하루의 삶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되겠단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