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곧 태어날 자식의 이름을 짓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고 했다. 이름에는 그 길이에 비해 큰 세상이 담기기 때문일 것이다. 내겐 입으로 건네는 명함이 되고, 남에겐 귀로 듣는 첫인상이 되고, 이름 따라 산다는 예언 같은 격언도 있지 않은가.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설적인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는 작업 중인 곡의 제목이 떠오른 순간에야 마침내 그 곡을 이해한 것 같다고도 했으니, 세상 모든 것은 이름으로 시작해 이름으로 끝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목이 그리워 듣게 되는 노래가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다. 같거나 비슷한 제목을 가진 것들은 어쩐지 묘하게 연결된 것 같다는 감각도. 앞으로 소개할 세 곡이 그러하다. 이름하여 ‘이방인’ 삼총사!

새소년, ‘이방인’
같은 제목을 나눠 가진 노래들 많지만 하필 ‘이방인’들을 고른 건, 이방인은 이름이 지닌 잔인함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이름 붙이는 일은 애정보다 미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따돌림당하는 아이가 갖게 되는 이상한 별명과, 외노자, 잼민이, 맘충, 틀딱 같은 단어들. 이런 것들은 이름이라기보다 문신처럼 새겨져 지워지지 않고 울타리처럼 세워져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게 이름의 그늘에서 이방인은 태어난다.
주류가 되지 못한 채 변두리를 맴도는 쓸쓸함. 새소년이 낳은 이방인은, 이방인의 숙명과도 같은 감정을 정석적으로 겪는다. 가사를 따라 자연스레 그려지는 그의 실루엣. 기침 같은 황소윤의 목소리. 멀리서부터 성가대처럼 들려오다 이내 폭발하는 악기 소리. 듣다 보면 크리스마스의 추운 명동 거리를 홀로 걷는 기분이 든다. 노래가 온몸으로 내뿜는 극한의 외로움에 기꺼이 춥다고 착각해 주며, 이방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주머니엔 비밀”이 먼지처럼 쌓인다. 주머니에 든 것이 전부 비밀은 아닐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줄 상대가 없어 그대로 비밀이 되어버린 말들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가진 이야기 중에 몇 개를 골라 비밀로 정하는 건 특권일지 모른다. 제때 털어놓지 못해 묵직해진 마음은 바닥에 질질 끌린다. “사람들에게 짓밟혀 이만큼 구겨진 코트”처럼. “떠나는 기분”으로 살지만 “갈 곳이 없”는 그가 낯설지 않다. 외로움이 차가운 이슬처럼 맺히는 이 나라에 사는 당신도 한 번쯤 이 사람이었던 적 있을 것이다.
새소년의 이방인은 잘 살아내리라 믿는다. 이 노래가 속한 앨범의 이름은 [비적응]이기 때문이다. 앨범 소개글에 따르면, 사회와 함께 살아가길 포기하는 ‘부적응’과 달리, ‘비적응’은 적응하지 않을 부분을 스스로 정하는 태도다. 무언가에 끝끝내 적응하지 않길 선택한다는 건, 다른 무엇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겠다는 다짐과도 같다. 이방인은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부지런히 떠돌 것이다. 사람들의 “초점없는 눈 사이로” 들어가려 애써 연기하지 않을 것이다. 따뜻함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채 그렇게 충실한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MONO NO AWARE, ‘異邦人(이방인)’
그러므로 이방인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부정당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부정하고 결국 이방인으로서의 나를 긍정하게 된다. 나를 멀리 두려 하지 않고 내 안에 품기로 결정하면 무언가 달라진다. 마음은 고독함으로 여전히 무거울지 모르지만 발걸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나를 향하던 미움만큼은 빠져나갔겠거니 싶다.
일본 밴드 MONO NO AWARE의 이방인도 한결 홀가분해 보인다. “나는 이방인(私は異邦人)”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경쾌하다. 새소년의 이방인이 한숨처럼 내뱉던 “우우우”와는 달리, 선언처럼 퍼지는 “아아아” 역시 적당히 들떠 있다. 산뜻한 기타 리프와 어깨동무하며 몸을 흔들어 보자. 신나지만 신나서 방방 뛸 정도는 아니다. 가사 역시 “새는 달릴 수 있는 생물을 부러워하면서 날고 있다(鳥は走れる生物を羨ましがって飛んでいる)”라고 하니, 자기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되어도 세상이 어딘가 허전한 건 일본도 똑같은 모양이다.
일본어를 잘 모르는 나는 번역된 글자 없이 귀로만 들어선 이 노래의 가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듣는 순간마다 MONO NO AWARE의 이방인과 노래를 나눠 부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감정 앞에서 언어란 얼마나 우스운가. 국적이란 얼마나 희미한가. 번역기 없이도 이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우리 모두 다 “누군가 제멋대로 이름 붙인 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誰かが勝手に名付けたものに囲まれて暮らしている)” 것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우리 모두 이방인이었어(みんな異邦人だった)”
Bye Bye Badman, ‘Stranger’
너도나도 이방인이니 잘 지내보자는 말은 아름다운 만큼 연약하다. 적막함이 익숙한 이들에게 함께하자는 약속은 버거울 법하다. 거리 조절에 실패해 진득이 뒤섞이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체온의 달콤함을 맛본 후 홀로 남겨졌을 때의 절망은, 줄곧 혼자였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깊다.
Bye Bye Badman의 화자가 머뭇거리는 건 그래서일까. 상대를 “환한 미소를 가진 천국의 눈(The eyes of heaven with a radiant smile)”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이미 홀딱 빠진 것 같은데 말이다. 상대 앞에선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I’m not dressed)” 게다가 “취해 있는(I’m tripping high)” 상태가 되어버리는 그가 사랑을 방어할 수 있을 리가. “절대 이방인이 되지 않을 것(I’ll never be a stranger)”이라 결심하는 그의 목소리가 미덥지 않다. 두려움이 앞서 마음껏 부딪히지 못하는 그는 이미 영락없는 이방인이다.
그럼에도 내겐, 세 명의 이방인 중에 그가 가장 강해 보인다. 무서워하면서도 도망치지 않으니까. “내 심장은 마치 네 눈 속의 우주 같고 내 눈은 마치 네 심장 속의 우주 같다(My heart is like the space in your eyes / My eyes is like the space in your heart)”고 고백할 줄 아니까. 발음은 흐릿하고 사운드는 번져 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또렷하다. Bye Bye Badman의 이방인은 결국 상대와 뒤섞일 것이다. 과할 정도로 테이프 에코를 건 탓에 우주 같은 공간감이 느껴지는 사운드를 배경으로, 두 개의 인공위성은 서로를 향해 돌진할 것이다. 충돌의 후유증으로 산산조각 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파편에게 ‘추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곤 한다. 그리워하는 건 이방인의 임무. 떠돌아다닐 영역은 이방인의 자산. 이방인의 세계는 그렇게 넓어진다.
살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을 때가 온다.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난 세 명의 이방인과 만난다. 외로웠다가 후련했다가 끝내 두근거리는 이 여정 속에서 내 모든 이름은 사라진다. 갖고 싶은 이름도, 되어야 하는 이름도, 버리고 싶은 이름도 힘을 잃는다. 대신 세 사람 옆에 서 있는 네 번째 이방인이 있다. 내 얼굴을 한 그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플레이리스트처럼 또다시 외로워질 테지만, 동시에 알고 있다. 내 옆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이 줄지어 있다는 것을. 이방인이라는 이름을 나눠 가진 우리의 목록은, 살아가는 동안 반복 재생할 만큼 충분히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