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봄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가장 성실히 달렸다. 그리고 매일매일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매일매일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가장 성실히 달렸다.
취업 준비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던 때였다. 친구들과는 우스갯소리로 ‘취준생’이 아니라 ‘취준준생’이라는 말도 했지만 내겐 저 마음의 준비마저도 지옥 같았다. 모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지 않는 태도가 유일한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었는데, 어느새 그 방향으로 달리기 위해 신발 끈을 묶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 꽤나 졸았지만 그중에서도 지리 수업이 유독 어려웠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아도 그 나라가 그 나라 같았다. 영국이 어느 나라 밑에 있는 게 나한테 뭐가 중요한지. 우리나라에 광주가 두 개인 걸 내가 알아야 하는지. 철없던 나는 딱 내가 밟고 있는 만큼만 인식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딱 내가 밟고 있는 만큼”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본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금요일마다 2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맡겨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종로3가에서 1호선으로 기계적으로 갈아탈 뿐, 종로3가가 대략 어디쯤인지, 학교로부터 얼마나 떠나와 있는지, 본가까지 몇 km 정도 남은 건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내가 밟고 있는 지하철 바닥은 전혀 내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철저히 이동하기 위해 자리 한 칸 빌린 사람. 다음 환승역까지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되는 사람. 움직이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다는 건 안락하지만 때론 오싹하다.
취준준생 나는 왜 고등학생 내가 생각났을까? 그건 머리로 해낸 기억이 아니라 몸이 아는 감각이었다. 러닝머신을 한참 타다가 땅바닥으로 내려오면 잠깐 어지러운 증상이 찾아온다. 러닝머신 위에서 다리는 달리고 있는데 앞에 보이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아 감각 시스템이 혼란을 겪은 탓이라고 한다.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앞만 보고 달리고는 있는데 주변 풍경은 그대로고, 이끌리듯 나아가고, 내 마음대로 멈출 수도 없고. 취준준생의 나와 고등학생의 나는 러닝머신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레일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 주며. 어지러움은 모른 척해주며.
그리고 달리기는, 러닝머신 위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기쁨을 준다.
두 발로 대지를 밟는 것. 한 발을 떠나보내며 다른 한 발을 내딛고 다시 한 발을 앞으로 내미는 것. 딱 그 보폭만큼만 이동해 있는 것. 그 보폭에 발맞춰 마주하는 세상의 앞모습도 변하는 것. 달리기는 이게 전부지만 달리기만 이걸 해낸다.
뛰어보니 알겠다. 이 세상을 두 발로 느끼며 이리저리 굴러보니 알겠다. 1km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30분 정도 뛰면 누구네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지도 앱에는 장승배기가 왼쪽에, 숭실대입구역이 오른쪽에 있지만 현관문을 나서 달리려고 보면 정확히 그 반대다. 지리시간에 배우던 세계만큼 거대하진 않지만 내가 살고 있는 반경만큼은 정확히 나의 품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내가 달려낸 만큼의 부피를 껴안고 있는 듯하다. 내가 밟고 있는 곳을 ‘정말로’ 밟고 있는 듯하다. 이제야 내 몸을, 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 듯하다. 몸으로 세상을 배우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운동장을 뛰놀던 어린 날의 당신은 알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여기에 있다.
사라질 것 같던 몸이 또렷해진다. 그러면서도 커지진 않는다. 달리고 달려도 세상은 닳는 법이 없으니까. 5km는 지구의 몸집에 비하면 하찮다. 어느새 이만큼 달렸네 싶다가도 고개를 돌리는 방향마다 앞길이 무한하다. 언젠가 20km를 달려낸다 해도 세상의 끝에 서 있을 일은 없다. 언젠가 이봉주만큼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해도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는 일은 없다. 내 것이 되기엔 이 별은 너무 원대하다. 러닝은 그렇게 일러준다.
나의 육체를 실감하는 동시에 나의 규모를 객관화하는 일. 당당한 자아와 겸손한 태도. 그건 근사하게 존재하는 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존재를 증명하고 나면 남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한결 수월하다. 분노와 질투와 불안은 대체로 나의 존재가 흔들릴 때 찾아오는 법이다. 달리고 있자면 그럴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다. 좁은 터널을 달릴 때 뒤에 오는 자전거에게 흔쾌히 길을 터줄 수 있다. 언제부터 뒤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앞질러 가는 저 사람에게 어떠한 열등감도 느끼지 않는다. 등 뒤의 인기척에 길을 비켜 주려고 보니 내 그림자였던 날의 기분 좋은 머쓱함은 덤이다.
가장 들뜨는 때는 반환점에서 방향을 돌리는 순간. 돌아갈 곳이 있음을 기억하며 둥글게 트는 순간. 출발한 곳이 곧 돌아갈 곳이다. 언제는 떠나갈 수 있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떠나면서도 두렵지 않고 돌아가면서도 권태롭지 않다. 같은 도로지만 떠나는 길과 돌아가는 길의 풍경이 다르다. 떠날 땐 보지 못했던 골목길을 돌아가는 길에 새로 발견할 수도 있다. 처음 본 길목으로 들어갔다가 막다른 길인 줄 알고 괜히 여기로 왔다며 투덜거리던 참에 골목 끝에 터 있는 좁은 길을 보고 웃음 지었던 날이 그랬다. 큰 틀을 달리되 작은 틈을 열어두는 여유. 아무리 보아도 달린다는 건 좋은 삶을 닮았다.
장황하게 러닝을 숭배했지만 매일 달리는 건 아직도 어렵다. 게다가 이번 여름은 전례 없는 폭염이라던데. 이런 날 뛰면 죽는다던데. 고민은 계속되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는 계속 달리고 싶다. 달리기가 없다고 해도 나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달리기와 공생할 때만큼 선명하지도 않을 것이다.
희미한 몸으로도 삶은 계속된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러닝머신에 올라탈 일은 언제나 생기겠지. 괜찮을 것이다. 잘 내려오면 되니까. 어지러워하다가도 달리기가 있음을 기억하면 된다. 러닝화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면 된다. 적어도 달리는 동안에는 존재하는 대로 존재할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