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 토요일이 저문다. 월화수목금 (가끔은 토일까지) 일을 하고, 주말을 기다리고, 일요일 저녁부터 불안해지는, 그런 지루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되어가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명분만을 동아줄처럼 붙들고 있지만 그까짓 명분, 언제 끊길지 모르는 거다. “아무도 이 삶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공평하다”는, 언젠가 읽었던 문장 하나에도 무너지는 게 삶의 의미이니. 허무와 냉소는 너무 쉬워서 꾸준히 떨쳐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쥘 수 있는 무기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중 가장 쉽고 강력한 건 단연 상상력이다. 좋은 걸 계속 상상하다 보면 정말로 내 것이 될 것 같다. 상상엔 값도 없다.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어디든 갈 수 있다.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하다가 프랑스 니스로 정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니스 가본 적 없는 사람의 니스 여행기. 돈도 시간도 없지만 상상력만은 남아도는 사람이 토요일 저녁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
프랑스는 내게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지만, 잘 알지 못해야만 동경은 가능하다. 무지라는 렌즈 앞에 추악한 면은 모두 가려지니까. 낭만은 흐릿한 눈으로 보아야 크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현실이 과하게 선명할 때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를 떠올렸고, 프랑스와 가까워질 수 있는 쉬운 방법으로 영화를 찾았다. 보통 영화를 혼자 보는 편이지만 <해변의 폴린느>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포함해 몇 번의 프랑스 영화를 타인과 함께했다. 전자를 같이 본 친구는 “난 프랑스 영화랑 안 맞나 봐.”라고 했다. 뒤따라 나오던 어떤 관객은 “그래서 이 영화는 뭘 말하고 싶은 거야?”라고도 했다. 후자를 같이 관람한 친구는 “감정선이 이해가 안 돼.”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덧붙였다. “영화가 예쁘긴 하다.”
아름다움. 영화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때조차 우리의 마음에 선명히 내리쬐는 것. 이해할 시간도 주지 않고 우리를 들이받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납득하게 되는 것. 배경지식 없이도 모두가 공평하게 느끼는 것.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다.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한 친구는 영화에 스치듯 등장한 보라색 꽃과 금발 머리카락의 조화를 기억했다. 나 역시 <해변의 폴린느>의 서사가 금방 와닿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프랑스 영화는 아름답다. 관람한 지 5년이 넘은, 나의 첫 프랑스 영화 <베티 블루 37.2> 역시 다른 건 흐릿해도 노란 건물과 분홍색 페인트, 푸른 데님의 장면만은 액자처럼 기억 속에 걸려 있다. 프랑스 영화는 미장센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테다.
oO(상상 시작!)
그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고 어느 여름 나는 프랑스로 향했다. 스크린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밖으로 끄집어내진 못하니 그렇다면 그 속으로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여러 도시를 가지는 않았다. 해변을 두른 니스와 고흐의 도시 아를, 그리고 빛을 머금은 엑상프로방스면 충분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아름다움의 목격 단 하나였으니.
이 글은 니스의 한 해변에 관한 글이다. 세 도시 중 니스에 관해 쓰게 된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고 니스 공항으로 되돌아 가보자. 비행기에서 푹 잔 덕인지 니스에 도착한 날의 몸은 아주 가벼웠다. 가벼운 만큼 들뜨는 발걸음을 꾹꾹 눌러 걸어야 했다. 들썩이는 마음을 겨우 붙잡은 채 우선 니스 시내로 가기 위해 트램 티켓을 뽑았다. 익숙한 듯 낯선 느낌의 트램에 몸을 맡기고 창밖을 구경했다. 푸른 해변과 푸른 하늘. 세상의 끝과 끝이 같은 색을 띠고 있다. 그 사이에는 나무와 도로와 사람들. 아름답군. 하지만 아직까진 제주도 정도의 느낌이군.
트램에서 내려 호텔까지 걸었다. 발바닥이 니스에 닿아 있어 그런지 트램 안에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왜인지 건물보다 건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가게들. 도로보다는 광장 같은 길들.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진 의자들. 주황색 지붕들. 파라솔. 파라솔. 파라솔. 아름다움이 잘게 흩뿌려져 있는 도시였다. 얼른 짐을 풀고 나와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의 모래를 움켜쥐었다. 쥐자마자 사라락 빠져나가는 모래를 막지 않았다. 그렇게 새어나가도 잃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내 것이 없으니 이곳에서 나는 모든 걸 잃어도 된다.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된다. 그런 넉넉한 마음으로 젤라토를 베어 물었다. 라벤더 향과 버터 향이 자연스레 뒤섞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선베드 하나를 골라 기대어 있으니 정말 니스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지만 포근하다. 자연이 당당히 살아있고 인간은 그 위에 살포시 앉아 있다. 니스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바다를 보고 있는데 옆 베드의 언니가 말을 걸어왔다. 현지 사람인 것 같았다.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눈짓 몸짓을 섞어 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니스 쏘 뷰티풀!”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리곤 작별 인사. 이렇게 부담 없이 누군가를 맞이하고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의 기쁨 중 하나. 때론 순간이기에 더욱 진심일 수 있다. 언니가 추천해 준 식당의 훈제 연어 피자는 정말 최고였다. 이 사람도 그 짧은 대화에 진심이었구나 느껴지는 맛이었다.
식당을 나와서는 해안가를 걸었다. ‘영국인의 산책로’라는 뜻을 가진 프롬나드 데 장글레는 지중해를 따라 니스를 껴안고 있다. 3.5km에 달하는 이 길은 18세기 후반 추위를 피해 니스로 떠나온 영국인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겨울에 니스로 몰려든 걸인들을 돕기 위한 대책으로 영국인들이 산책로를 조성한 것이다. 내쫓기보다 품기 위한 길. 이 길에선 아무도 내몰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길을 따라 누군가는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걸었으며 누군가는 뛰었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탔다. 기나긴 길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속도와 모양대로 머물러도 되었다. 승리라는 뜻을 가진 도시의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니스의 해변에서는 그 누구도 남을 앞지르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구글맵을 켜지 않고 목적지 없이 거닐었다. 이곳에서 걸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다. 해가 질 때까지 걸어도 몸도 마음도 춥지 않았다. 아 니스 살고 싶다. 노력하지 않아도 햇볕 쬐듯 평화를 누리는 삶. 그런 삶에 질투가 일었다. 아름다움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눈앞에 두고 나니 주머니 속으로 넣어버리고 싶네. 욕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영화와 달리 아름답기만 한 현실은 없으니까. 아름답다고 박제해 버리기엔 현실은 오돌토돌한 부분이 많으니까. 여행객의 환상으로 현지인의 현실을 시샘하는 건 오만한 짓이니까. 그 사실을 증명하듯 니스 역시 상실의 아픔을 품고 있었다. 1789년,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은 시작되었다. 프랑스 민주주의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매해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의 날’을 기념한다. 2016년에도 그런 취지로 프롬나드 데 장글레에서 축제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축제에서 8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2016년 니스 테러였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4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지냈다. 이 사실을 여행 한복판에 알았고, 니스를 영화처럼 단편적으로 탐미하던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문화적 역사적 맥락은 소거한 채 아름다움만 골라 먹은 기분에 어딘가 찝찝했다.
도시에는 영화보다 더 생생한 삶이 어려있다. 카메라로 환상적인 풍경만 담았다 해도 카메라 밖에 있는 상처와 한숨, 고민 그리고 미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니스와 해변도 그럴 것이다. 나는 한발 물러나 있는 관광객이기에 그저 아름답다고 감상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곳도 내가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 어디든 절망은 있으니. 왜인지 해변을 따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놓인 의자들이 마치 절망과 희망이 손을 잡고 이어진 모습 같았다. 훈제 연어 피자를 권했던 언니의 어깨를 따라 나 있던 흉터처럼 아주 길게, 끊어질 기색도 없이. 그렇게 촘촘히 교차한 절망과 희망의 무늬는 결국 삶이 된다. 각자의 자세로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니스의 사람들이 된다. 이것이 내가 니스에 관해 쓰고자 마음먹은 이유이다. 아를은 묵직했고 엑상프로방스는 풍성했다. 그리고 니스는 살아있었다. 절망이 느껴졌고,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고 삶을 품고 있었다.
여행의 계기는 아름다움의 목격이었지만 니스를 떠나는 날 나는 그 목적을 철저히 버렸다. 영화에 조립된 한 컷 한 컷으로 도시를 판단하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됐다. 기대했던 아름다움을 분명 목격했지만 그래서 감각적으로 만족했지만 그건 여행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보다 오래 가슴에 남는 건 단연코 해변과 사람들. 상실의 아픔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그 많은 이들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왜인지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다. 바다 건너 니스에서 온몸으로 느낀 진짜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이제 프랑스 영화 속 풍경만으로 막연한 동경을 느끼지도,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인위적인 향수를 느끼지도 않을 테지만, 사람들을 안고 있던 니스 해변만은 종종 떠오를 것 같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이 기다란 상상을 마치고 나니 회색빛 서울의 좁은 자취방이 펼쳐진다. 상상과 현실의 낙차는 크지만 아프지 않다. 내게 상상은 현실의 탈출구가 아니다. 좋은 미래를 끊임없이 그리고 그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트는 일이다. 살면서 니스에 갈 일은 쉽게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상상 속에 지어둔 나만의 니스처럼 살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적어도 건조한 현실에 순응한 채 차갑게 굳어버릴 일은 없지 않을까. 니스 다음은, 내일은 또 어디로 가볼까. 가본 적 없는 세상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주말 끝에 월요일은 금방 다가오겠지만 그것이 무섭지는 않을 것 같다. 월요일을 두려워하기엔 아직 가볼 곳이 많다. 잊지 말자. 저 수평선 너머에도 삶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