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들을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살 것 같다. 이 얼마 만의 차가운 아이스커피인가. 얼음 동동 띄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는데 눈물이 난다. 사실 며칠 전 더위를 먹은 데다 급체까지 하는 바람에 삼일 정도를 기어다녔다. 이온음료로 뒤집어진 속을 달래고 약을 먹어야 해서 먹는 밥도 새 모이 만큼 먹었더랬다. 차가운 음식은 더더욱 멀리했다.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 중에서 제일 그리웠던 게 시원한 커피였다. 거의 좀비 상태였는데 카페인 수혈도 못하게 되자 이건 뭐 서러워진 좀비 몰골과 다를 게 없다.
짧고 굵게 앓다가 기운을 차린 나는 간절했던 아이스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좀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다시 살아난(?) 기념으로 마신 커피에서는 ‘살 것 같은 맛’이 났다. 조금 엉뚱할 수 있으나 이 강렬한 맛에서 힌트를 얻은 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별의별 커피 맛들을 한곳에 모아 보기로 했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나와 함께 했던 커피들. 여러 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르게 다가왔던 커피 맛들을 정리해 본다. 재밌는 작업이 될 거다.
아는 맛
아는 맛이 가장 무섭다. 일단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맛없없’ 맛으로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으며 두루두루 사랑받는 그 맛! 편의점에 가면 그런 맛의 커피가 있다. 심지어 가성비도 좋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히 달고 부드러우며 적당히 쌉쌀한 저 커피는 가격 대비 내게 그럭저럭한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그럭저럭에서 가심비까지 좋다고 느낀 것은 얼마 안 된 일이다.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사진 속 커피를 마시며 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변수 없고, 예측 가능하며, 언제 찾아도 변함없는 그 고정되고 안정된 맛이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잡아 주기 때문이다. 아는 맛은 불안에 특효가 있다. ‘나는 그대로니까 생각나면 언제든지 잡숴 보슈’의 느낌이랄까. 그럭저럭 커피는 현재 나의 편의점 최애 커피로 레벨업한 상태다.
노동의 맛
쪽파를 깔 줄 안다. 아욱이나 열무 같은 것도 곧잘 다듬는다. 콩이나 팥도 야무지게 턴다. 대체로 무언가를 까고, 다듬고, 손질하는 일에 익숙한 편이다. 이 일에는 품이 많이 든다. 조금은 수고스러우며 어느 정도의 인내를 요한다. 하다 보면 어깨가 결리고 고단함이 몰려오는데 그때 커피만큼 좋은 보상도 없다. 밭일을 하다 새참 시간이 되면 막걸리가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수고로움에 스스로 사례하는 것! 셀프 대접을 하듯 커피 한잔 해 주면 남은 일도 무리 없다.
급속 충전이 필수인 순간도 있다. 잠긴 목소리에 졸음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서 출근한 토요일 아침이 그랬다. 점심까지 달려야 하니 텐션을 바짝 올려야 했다. 속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종이컵에 스틱커피를 붓고 대강 휘휘 저어 얼음 몇 알을 집어넣는다. 피곤한 건 피곤한 거고 잘하고 싶은 건 잘하고 싶은 거고. 제대로 하고 싶은 의지만 살려 놓는다. 좋은데 마음만은 불도저라면 카페인 기세로 밀어붙이는 것도 괜찮다.
그리움의 맛
타지에서 각자 사는 게 바빠 분기별로 만나거나 명절 때 맞춰서 보면 그것도 자주 만나는 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볼 수 있을 때 꼭 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를 비롯하여 인연에 대한 소중함을 갈수록 체감하고 있다. 점처럼 있다가 서로 연결되는 순간이 더없이 귀하다.
어쩌면 커피는 구실일 수도 있다. 보고 싶다, 그립다는 말을 커피 마시자는 말로 돌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미뤄 두었던 그리움을 한번에 해소하는 것처럼 만남의 순간만큼은 세상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하다. 테이블에 놓여진 커피는 아마 그리움의 맛을 띤 채 조용히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있을 거다.
위로의 맛
엄마의 어깨 수술을 결정하고 병원을 빠져나온 날이었다. 수술부터 경과 체크까지 서울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힘듦보다는 엄마가 느낄 좌절감에 더 신경이 쓰였다. 건강에는 결국 한도가 있음을.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인생에서 한 챕터가 저무는 것 같은 허망함을 우리 둘 다 느꼈을 거다. 터미널에 도착한 우리는 버스 시간이 멀어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방금 나온 커피가 너무 뜨거워서 뚜껑을 열고 식히는 동안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쳐다봤다. 마음이 안 좋을 때 김 구경을 하고 있으면 그냥 있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살짝 식힌 커피를 한 모금 하자 어수선하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따뜻한 커피가 종일 긴장 상태였던 몸과 마음을 구석구석 어루만져 주었다. 고요한 위로가 슬픔이 더 커지지 못 하도록 도왔다. 복잡한 기운이 옅어지면서 생각회로가 다시 작동했다. 건강 회복 0순위, 그 외 모든 것들은 잠시 아래에 둘 것, 여기에 대왕 별표. 다음을 확보하기 위한 깔끔한 결정이었다. 엄마 가방에서 튀어나온 뜬금없는 쿠키도 커피에 곁들여 먹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인 거라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한참을 기댔다.
남이 타 주는 맛
내 어머니 임 여사는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커피=남이 타 주는 커피’라는 커피 이론을 가지고 있다(라면도 마찬가지). 여기에서 ‘남’은 ‘나’를 가리킨다. 혈육인 나는 그녀의 커피 기호를 잘 알고 있다. 임 여사에게 기본 커피란 너무나도 쓰디쓴 까만 물이다. 카페에서는 시럽으로, 집에서는 설탕으로 달달하게 간을 맞출 필요가 있다.
작은 컵에 인스턴트 알커피 티스푼으로 평평하게 하나, 설탕은 수북하게 하나. 임 여사의 입맛에 딱 맞춘 커피 레시피다. 블랙커피지만 연해야 하고, 설탕이 들어가고, 또 달게 타는 것이 이 레시피의 핵심이다. 나름의 손맛으로 공들여 제조한다. 식후에 이 달달한 커피를 그녀에게 슬쩍 내밀면 이제 나는 세상에서 제일로 센스 있게 맛난 커피를 타는 남이 되는 거다. 빈 접시로 돌아올 때 행복해지는 요리사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잔을 보고서 잔잔한 보람을 느끼는 나다.
반대의 순간도 있다. 가끔씩 엄마가 타 주는 블랙커피를 얻어 마신다. 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나는 그냥 조용히 재빠르게 샷을 추가한다. 뭐 그런 맛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