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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한미 삼청본관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포토북 속의 매그넘 1943-2025》. 그저 유명 사진가들의 멋진 사진들을 감상하리라 예상했던 전시는, 켜켜이 쌓인 페이지 속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이곳은 단순한 사진전이 아니었다. 한 장의 사진이 품고 있는 찰나의 미학을 넘어, 수십, 수백 장의 사진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서사’의 세계였다.

 

전시의 도입부부터 흥미로웠다. 매그넘 포토스라는 이름의 기원처럼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탄생을 축하했을 그들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 전시는 단순히 매그넘의 위대함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포토북’이라는 매체의 물리적 감각과 서사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식이었다. 디지털 이전 시대의 사진가와 에디터들이 "각 페이지를 출력해 펼쳐보며 리듬과 흐름을 조율하던 방식에서 착안해 기획되었다"는 설명처럼, 전시장 곳곳에는 그들의 고민과 의도가 배어 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전환되는 장면들, 사진 사이의 여백과 배열이 만들어내는 리듬감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을 주었다.

 

마음을 끄는 공간은 마틴 파의 기획 아래 젊은 작가들이 포토북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Part 3’와 천경우 작가가 기획한 ‘Part 6. 라이프-타임’이었다. 특히 ‘라이프-타임’에서는 인간 삶의 다양한 단면을 담은 포토북들이 전시되었는데, 치엔치 창의 『The Chain』이나 알렉 소스의 『Dog Days Bogotá』 같은 작품들 은 단지 기록을 넘어선 작가들의 깊은 시선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이 책들은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 이상의, 공감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그들의 희로애락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포토북이 우리 '일생'과 '삶'을 어떻게 은유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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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참신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Part 5. 미출간 프로젝트 『Eye to Eye』’였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포토북의 더미북과, 이를 위해 매그넘 포토스와 작가들 사이에 오고 간 서신 일부를 공개한 점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보통 전시는 완성된 결과물만을 보여주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기획 과정의 숨은 이야기, 예술적 소통의 지난한 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포토북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지, 때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실패조차도 창작의 일부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진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와 고민들을 마주하며, 전시된 작품들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관람객이 직접 매그넘 작가들의 포토북을 만지고 읽을 수 있는 리딩룸’은 이 전시의 백미였다. 눈으로만 보는 것을 넘어, 손으로 책장을 만지고 넘기는 행위는 디지털 화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물리적 감각과 유대감을 선사했다.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단지 종이를 만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숨결과 의도가 담긴 한 편의 이야기를 ‘읽고’있었다. '읽히는 사진'의 성격을 일상적 감각으로 확장하고자 한 시도 라는 설명처럼, 이는 사진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경험'하게 만드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뮤지엄한미의 《포토북 속의 매그넘 1943-2025》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시각적 힘과 서사적 가능성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한 전시였다. 단순히 ‘보는’ 경험을 넘어, ‘읽고’, ‘만지고’, ‘공감하며’, ‘사유하는’ 다층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포토북이 단순한 기록물의 묶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증언이자, 한 개인의 삶을 응축한 작은 우주임을 깨닫고 온 뜻깊은 시간이었다.

 

전시장 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내 안에는 페이지마다 켜켜이 쌓인 이야기의 잔상과 포토북이라는 매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깊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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