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군가의 간절한 열정은 횃불로 표상된다. -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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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공감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걸.
누가 쇼펜하우어의 ‘동고’를 염세주의라고 폄하했는가. 난 이번 독서를 통해서 완벽하게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전체적인 테두리 안에서 성격, mbti라는 표상적 상자 안에 자신들은 보관하면서 살아간다. 심리학적인 경계들에 호기심이 많은 나일지라도 잠시 이 상자가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온 힘을 쏟아부어도 이미 나의 성과와 평판은 제한되어 있어 알을 깨고 나가기 힘든 느낌. 소설 [데미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아의 모습에서 아주 멀어졌다.
이런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다 보니, ‘나’란 인간을 제한해서 표현해 볼 때 열정과 끈기라는 의미로 통일시켰는데, 이에 따라 가끔 나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열정과 끈기에서 의지력이 떨어질 때면 동시에 나도 세계에서 패배자로 전락하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구직, 창작의 고통, 게으름 등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이런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나의 무기력을 해결하고 싶었다. 조금만 살이 붙어도 부해지는 느낌이 싫어 미친듯이 운동하는 사람처럼, 조그마한 무기력함에도 무던해지는 삶, 그런 세계 속에서 살고 싶었단 말이다. 그게 또 다른 나의 간절한 열망이자 소망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 쇼펜하우어가 말한 이 말을 도서에서 만나게 된다.
“아직 무언가 소망하고 노력할 것이 남아 있을 때가 그래도 제일 행복한 법이다.” 이 때 소망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행복이라 불리고,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은 고통이라 불린다. ~ 이 세계는 의지의 객관성이자 의지의 드러냄이며 의지의 거울이다. 이 특성에서 세계가 표현되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고찰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욕망하고 있고 고찰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의미를 고민하는 것조차 의지와 표상의 세계인 이 곳에서는 행복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 내 마음을 울렸다. 300% 완벽한 삶이 아닐지라도, 이 삶이 왜 완벽하지 않은지를 생각해보면 내가 이루고 싶은 소망과 희망들이 달라붙어 600%의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듯이 의지는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인간은 성격으로 현상화되기 때문에 내가 지금 겪는 이 무기력함의 무자비한 난무도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의지는 본디 태어난 걸 이렇게 태어났다.”
내 열정은 횃불이다. 강한 폭풍우가 불면 그래서 당연히 꺼진다. 꺼지지 않는 불은 허상이나, 누군가 만들어낸 환타지 속 존재할 수 있었겠지.
아무리 강철과 같은 의지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싶어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가변적인 나의 모습과 행동. 그리고 그 행위를 당연하게도 이해해주는 의지와 표상에서의 세계. 물론 유쾌한 삶의 연속점들을 그리다가 불쾌한 협곡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만 이 세계가 인식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세계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에 난 이제서야 왜 넘치게도 “동고”되고 있는 것인지.. 내 의지인지, 누구의 의지인지는 몰라도 이번에 표상된 나의 모습은 참 마음에 든다.
[임주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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