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작가는 <그녀의 세 번째 남자>에서 “하얀 개”를 등장시킨다.
절에서 키우는 ‘하얀 개’, 들개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암컷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수동적인 태도로 들개들이 걸어오는 추파에 대응하는 상황이 이미 익숙한 것이다. 그 개는 반항할 힘도, 반항해야 하는 이유도 깨닫지 못한다. 처음 은희경 작가의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 하얀 개는 이미 한번 발악을 했던 경험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번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나는 위에서 이야기 했던 하얀개가 떠올랐다. 특히 영혜를 보고 한강 작가가 어떤 주체를 그리고 싶은지 그리고 그 주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혜는 채식주의자다. 하루 아침에 수많은 꿈들이 만들어낸 채식주의자. 그녀가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남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부..까지 그들은 모두 그녀가 어쩌다가 채식만을 고집하며 살아가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항상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 영혜 “꿈을 꿨어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은 이러한 답변에 깊은 답답함을 느낀다. 총 세 개의 시점 (남편, 형부, 언니)로 이루어진 ‘채식주의자’에서는 그런 영혜를 둘러싼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한심하고 무기력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실랄하게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성적 욕구, 성취적 욕구 그리고 미세한 질투의 욕구들이 영혜를 무자비하게 괴롭힌다.
한강의 작품을 처음 기사에 다룬 “여수의 사랑” 서평에서부터 한강은 인간의 고통과 상실 그리고 절망과 좌절감이 이루는 상황들을 자연적으로 묘사해왔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한 가닥이라도 있는 현실이라면, 한강 작가가 이렇게나 잔인한 작품을 썼을 것인가.
그녀의 세번째 남자는 1990년대 여성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작품, 채식주의자는 2000년대에 이어지는 여성 페미니즘과 에코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1990년대의 작품이 내비치고 있는 현실과 2000년대 작품이 시사하고 있는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바이다.
기껏해야 개에서 사람으로 발전한 정도라고 설명을 해야할까. 잠시 웃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채식주의자가 현재 보수 단체에 의해 큰 반발을 이끌어내고 있는 문학이기도 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등, 학생들에게 유해한 문학이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물론 나도 채식주의자 특히 몽고반점을 읽는 동안 많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고통이 비참하고 한없이 나를 몰아세우는 현실을 직접 마주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울지는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고통은 직접 겪지 않는 이상, 하얀 개가 직접 되어 보지 않는 이상, 영혜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절대 실감하지 못한다. 1980년부터 있던 성적 묘사가 주는 큰 충격은 오래전부터 독자들에게 다시 생각함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존재했던 장치였다.
장치가 주는 효과도 좋지만, 이 장치를 도입한 작가의 생각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1순위라는 사실. 그것이 하얀 개와 영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