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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날갯짓일까, 몸부림일까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영화]

방황하는 일본의 청춘들에 대하여

by 정주원 에디터
2025.07.20 12:55

 

 

날갯짓일까 몸부림일까,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어떠한 비극은 어리기 때문에 청춘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관계, 직업, 거주지. 어느 하나 정착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달리 말하면 당장 다음 날의 생과 사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세 청춘은 모든 것에 초연하며 시종일관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이들의 청춘은 감춤으로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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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즈오’, ‘사치코’는 하코다테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다. 무단결근을 하고, 매 밤을 술로 보내고, 클럽에 다니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불안정한 청춘들. 영화의 줄거리는 이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기록하는 것에 불과하다. 술 마시는 모습, 잠자리를 가지는 모습, 셋이 함께 클럽에 가서 음악을 듣는 것. 그것뿐인 이 영화가 어떠한 울림을 주는 것은 세 청년이 각자의 고민들을 마음 저 한구석에 숨긴 채로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치코는 한 번에 여러 명을 사랑하며 그 관계를 부러 정리하거나 끊어내려 하지 않는다. ‘나’는 사치코가 점장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그녀를 얽매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그녀의 자유라고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사치코에게 시즈오를 소개하고 셋이 함께 다니며 사치코와 시즈오가 사랑하게 된 것을 짐작하고 있지만, 절대 둘의 관계에 대해 묻지 않는다.

 

세 인물들은 모든 면에서 하나로 정착하지 못한다. 시즈오와 ‘나’의 집에서 살게 된 사치코의 주거환경, 여러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사치코, 직장을 꾸준히 다니지 못하는 ‘나’. 이들은 모든 것들을 방관적인 상태로 해결하지 않은 채 유지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회피한다.


그들의 초연한 얼굴과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들은 무기력한 청춘의 모습을 나타낸다. 예측이 불가능한 삶을 살아가며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 자신의 삶을 외면하고 방관한다. 이들의 표정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무기력감에 빠져있는 당시 청년들, 더 나아가서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삶’은 우연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 모든 청년들을 대표한다. 불가능과 변수로 이루어진 삶은 결국 우연에 기대있고,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본인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적어지기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모습들이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결국 실업 상태를 유지하고, 여러 사람과 사귀고, 그것에 의문을 갖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 것이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어기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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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가 생각하는 청춘은 무엇일까?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이 질문의 정답 같은 영화이다. 비가 오는, 덥고 습한, 물기가 가득한 여름의 날씨는 106분 내내 화면 너머로 느껴진다.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이 겪고 있는 날씨는 그들이 처한 상황인 동시에, 동시대 일본의 청년들이 공유하는 감수성이다. 축축한 날씨에 습기를 가득 머금은 깃털이 치는 날갯짓. 미야케 쇼는 청춘들의 날갯짓인지, 몸부림인지 알 수 없는 몸짓을 마지막 장면으로 표현해낸다.


무기력, 우울, 심연에 빠져있는 ‘나’는 마지막까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등장인물이다. 주인공인데도 이름을 가지지 못한 남자. 시종일관 무표정인 남자는 시즈오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치코의 말에 그녀를 존중한다고 하며 헤어지지만 20까지 숫자를 센 후 횡단보도를 달려가 사치코를 붙잡는다. 영화가 진행되며 구타당하고, 사치코에게 꼬집히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서서히 자신을 적셔가며 깨어난 나는 용기를 낸다.

 

이는 ‘나’의 날갯짓이자 몸부림이다. ‘나’는 더 이상 방관하지 않는다. 회피하거나 도망치고, 모르는 척을 하지 않는다. 함께 보낸 수많은 밤과 함께 맞은 수많은 비, 축축하게 더운 여름 날씨에 적셔진 ‘나’는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야 드디어 사치코를 잡으러 달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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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으로 이루어진 삶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더라도 결국은 날갯짓하려 하는 모습. 이미 마음이 떠난 여자친구에게 달려가는 것. 방관과 회피로 이루어져 불안정함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삶이지만 그 위에서도 결국 몸부림치는 모습. 물론 그 펄럭임이 날갯짓이 될지, 몸부림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사치코가 ‘나’에게 돌아올까? 시즈오와 ‘나’를 둘 다 선택할까? 알 수 없다. 방황하고 부유하지만, 어떤 끝에서는 피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결국엔 날갯짓이든 몸부림이든 치며 나아가는 청춘의 회복탄력성. 그것이 바로 미야케 쇼가 그리는 청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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