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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왓챠피디아의 가장 위에 있는 후기를 읽다 눈에 꽂힌 말들이 있다.

 

‘코사인 함수처럼 생긴 길에서라면 더 빠른 사람이 이기지 않는다. 시야를 이용하는 사람이 이긴다. 자신이 지나온 길과 앞에 놓인 길이 똑같을 것이라고 상정하는 사람이 진다.’ (- 천수경님 왓챠피디아 리뷰)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영화를 보고 이런 글을 쓸까, 하면서 계속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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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아주 정치적인데 코믹하게 의외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주인공은 의외로 무능력하고, 의외로 그닥 멋있지도 않고, 의외의 인물들의 도움을 받는다.

 

아빠가 딸을 구하는 이야기는 뻔하지만 진짜 아빠가 구하는 게 맞나? 생각하면 아닌 것도 같다. 그래서 의외다. 그게 되나, 싶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나는 사실 <펀치 드렁크 러브> 말고는 PTA의 영화를 본 적이 없고, 씨네필이 되고 싶은 사람이지만 펀드럽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장의 영화를 비가시화해 왔다.


내가 스무살 때 펀드럽을 보면 참 좋았을 텐데. 스물 일곱이 다 지나고 본 <펀치 드렁크 러브>는 그냥 대책없는 남자 주인공이 더 대책없이 사랑을 하느라 보는 나를 답답하고 열받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래도 사랑에 바보가 되는 사람들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어찌됐든 난 저 바보같고 또 바보같은 아담 샌들러를 보면서 왜 저래? 왜 저래?!를 외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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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도 대책없고 바보같은 남자주인공인 밥 퍼거슨이 나온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16년 전 암호를 기억해내지 못해 무한굴레에 갇히는 사람. 아 진짜 저 바보 아저씨 왜 저래?! 라고 가슴을 퍽퍽 치게 만드는 사람.

 

16년 전에는 총을 쏘고 혁명을 외치며 터지는 폭탄 아래에서 가장 섹시한 혁명가 여자와 가장 스릴있는 섹스를 나누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딸을 과보호하고, 배가 나온 채로 마약을 하며 제대로 달리기도 하지 못하는 아저씨. 그래서 경찰에 잡히고, 무전기에는 배터리가 없고, 암호도 기억하지 못해 소리를 빽빽 질러대며 막무가내로 구는 그런 한물 간 남자.


과거의 혁명 영웅은 이제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실제로 윌라를 구하는데 뭐 그렇게 큰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항상 한발 늦고, 저격에도 실패하고, 센세의 자동차에서 훅 떨어진 그냥 쓰레기다. 16년 전 혁명 영웅이 무언가를 멋지게 보여주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 자신들의 ‘순결’을 증명하느라 총을 쏴대는 이 모순의 시대에서 그들만의 혁명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자들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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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를 진짜 구해주는 건 아반티다. 손목을 풀어주고 윌라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대신 죽이는 아반티.

 

윌라에게 갈 수 있게 무전기를 충전할 곳을 내어주고, 밥에게 총을 건네주고 불법 체류자들을 안전하게 대피 시키는 세르지오 센세, 백인들의 혈통주의 나라에서, 뭐든 한발 제대로 쏘는 자들은 모두 유색인종이다. 아반티는 인간성을 가졌고, 세르지오는 연대의 의미를 안다. 그들에겐 그게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까지가 중요하다. 당연하고, 그래서 자연스럽다.

 

세르지오가 엄청난 속도로 내뱉는 스페인어는 번역되지 않고 우리에게 그대로 날아온다. 이 지겨운 레이시즘의 나라에서 스페인어는 그 자체로 암호다. 암호를 기억하지 못해 머리를 쥐어 뜯는 밥에게 세르지오는 8시 15분이라고 대답한다. 그건 정답이자 오답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암호인 사람에게 몇시냐는 암구호는 의미가 없다.

 

지금은 그냥 8시 15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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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밥이 정말 쓸모없이 가버렸냐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암호도 까먹어, 달리기가 느려서 경찰에 붙잡혀, 저격도 실패해, 엉망인 모든 것을 다 해내지만 밥에게는 윌라가 있다. 휴대폰이 없다고 거짓말을 해서 수녀원의 위치를 들키게 했어도 윌라는 퍼피디아의 딸이다. 배신을 후회하고 여전히 행동하며 대부분의 순간 뜨겁게 타올랐던 사람의 피를 물려받았다.


뜨거웠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흉터가 남는다. 밥에게는 퍼피디아에게 배신당해 숨어지내면서 망가진 16년의 세월이었을 거고, 퍼피디아에게는 동료들을 배신한 자기 자신이었을 테고. 그렇지만 그들이 뜨거웠기 때문에, 소녀는 자라나서 위아래로 굽이치는 커브길에서 자신을 뒤쫓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또 하나의 뜨거운 사람으로 자라났다.

 

스미스에게 총을 쏘고, 자신을 찾아낸 밥에게 달려가 안기는 대신 암구호를 묻는 사람이 된다. 윌라는 이들에게 흉터가 아니라 상패와 흔적이다. 총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 결국에는 비오는 날 오클랜드의 시위 현장으로 3시간 동안 차를 몰고 떠날 수 있는 그런 사람. 결국 실패한 건 록조다. 밥은 실패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영화가 좋다. 재미가 있는데 주제가 내러티브를 잡아먹지 않는 영화는 더 좋다. 재미가 있고 주제가 표면에 떠있지 않은 대신 연출이 주제를 붙잡고 바로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는 영화들이 좋다. OBAA가 그랬다. 다 됐고, 162분에 홀딱 빠졌다. 8시 15분 장면에서, 나무를 타다 밥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모두 다 함께 웃었다. 굽이치는 카액션 시퀀스에서 모두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고 심각한 표정이 됐다.

 

영화관의 존재 이유를 느끼며 광대를 올리고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영화가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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