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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얼룩을 만들고 오답으로 남는, 뮤지컬 레드북


 

레드북이 돌아왔다. 재연부터 시작해서 매 시즌을 보고 있는 최애 뮤지컬 <레드북>. 그동안 봤던 횟수를 세어보자면 적어도 한 시즌에 4번씩은 봤고 이번 시즌이 아마 보지 못한 초연을 제외하고 내 기준 3번째 시즌이다. 이번에도 당연히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일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당황했던 순간부터, ‘그래도 돌아왔는데 어떡해! 가야지!’를 외치며 5호선을 1시간 동안 타고 아차산 역에 내리는 모든 순간들이 즐겁다. <레드북이니까>.


<레드북>은 아주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여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극이다. 레드북에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에게 주어진 당연한 편견을 부수고, 여성에게 배제된 권리와 자유를 찾아나가는 ‘안나’가 있다. 글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욕망을 실현하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도, 금기시 되었던 성적인 자유를 당당하게 누리게 된 마을의 여성들도 있다. <레드북>은 아주 촘촘하게 쌓아올린 여자들의 외침이자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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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북>은 모두가 자신을 나머지라고 부를 때 ‘뭐긴 뭐야 나는 나야, 나는 안나!’라고 제 이름을 경쾌히 외치는 넘버로 시작한다. 여자라면 응당 결혼을 해야지, 여자가 왜 일자리를 구해? 라는 수많은 물음에 안나는 나름의 대답을 가지고 있다. 성희롱하는 사장님을 끝까지 쫓아가다가 구치소에 들어가도 주눅들지 않는다. 이름을 가진 여자는,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라고 말하며 올빼미 흉내를 내는 이상하고 솔직한 여자는 결코 나머지가 될 수 없다.


나머지가 아니고 나는 안나! 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안나는 결국 난 뭐지? 라고 질문을 던진다. 내가 뭐가 문제인지 아직 모르겠다며.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이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런던이니까. 안나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브라운이 바이올렛의 유언으로 안나를 찾아오게 되고, 안나를 특이하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사무실에서 알바를 하겠다는 안나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바이올렛이 안나에게 얻었다는 삶의 열쇠를 생각해보면 안나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라며 겉치레 인사를 하지만 안나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는다. 도서관으로 자신을 데려다 준 브라운 덕분에 로렐라이를 마주치게 되고, 여자가 쓰는 삼류 잡지라는 말에 더 잘쓸 수도 있지 않냐며 그 길로 곧장 로렐라이 언덕을 찾아간다.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사람. 마음 먹은 건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2막에서 브라운이 말하는 ‘참 이상한 여자’ 그게 바로 <레드북>의 안나다. 도무지 런던에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여자. 혼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은 여자.


그리고 로렐라이의 언덕에는 그런 여자들이 있다. 글로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을 아는 여자들. 1막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 중에 하나가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인데 각자의 욕망을 가진 여인들이 펜을 들고 글을 쓰며 자신의 욕망을 풀어내는 부분이 정말 완벽한 멜로디와 화음으로 구성되어있다.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여성 문학회의 수장인 로렐라이가 여장을 한 남자라는 점에서 처음 공연을 보았을 때는 황당했지만 2막에 개방적이고 아름다워서 많은 이들의 사랑과 미움을 받았던 여인을 사랑했고, 그녀를 잊지 못해서 여장을 하며 그녀를 평생 기억한다는 서사를 알게 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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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이라는 넘버는 가사 한줄 한줄에 울림이 있다.

 

‘낡아 빠진 관습을 부수고, 바보같은 규범을 허물어, 다시 그 자리에 성을 지어. 그 자리에 새로운 성을 지어’, 이들이 지은 새로운 성은 ‘철학으로 올린 지붕과 신념으로 세운 기둥들, 상징으로 만든 계단과 비유들로 꾸민 가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은 각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욕망을 부수고, 현실에서 이 여자들을 벗어날 수 있게 만든다. ‘날 안좋아하는 여자와도 얼마든지 질펀하게 뒹굴 수 있다’는 메리의 말 뒤에 이어지는 여인들의 합창. 그리고 이 문학회의 수장이지만 생물학적 남성인 로렐라이는 넘버를 전혀 부르지 않고 펜을 건네주는 역할을 맡은 것까지, 볼 때마다 늘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넘버다.


그리고 레드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꽤 많은 돈을 벌며 기뻐하고 있을 때, 안나는 상처받는다. 브라운이 체면 때문에 레드북을 발로 밟으며 ‘나쁜 잡지! 더러운 잡지!’라고 말하고 신사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상처받은 안나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글로 쓴 것이 나쁜 여자라면, 나는 나쁜 여자, 야한 여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 말하며 아주 솔직하게 사랑을 적어 내린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부끄러움 따윈 모르는 야한 여자가 되겠다고 한다.


‘조롱을 끌어안고, 비난에 입을 맞춰. 나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들과 밤새도록 사랑을 나눠‘ 이 가사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저릿해진다.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향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야한 여자가 되겠다는 마음이 억압당했던 모든 여성들 중 맨 앞에 서겠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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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에서는 위기가 계속된다. 평론가 존슨의 성희롱에 폭행으로 대응한 안나를 찾아온 브라운은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좋아할 수는 있는 것 아니겠냐며 고백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악의를 품은 존슨이 사람들에게 레드북이 사회를 문란하게 만들고 여성들의 정숙을 방해한다며 여론을 조성하고 결국 레드북 중에서도 가장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낡은 침대를 타고‘의 저자인 안나는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강제노역이나 추방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브라운이 제시한 해결책은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것이었고, 안나는 이를 거부한다. 사람들에게 네가 읽은 건 미친 여자가 쓴 소설이야- 라고 말할 수 없다며. 대신 이 소설이 정말 나쁜 영향만을 끼쳤을 리는 없다고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하나하나 따져보자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감옥에서 만난 클로이가 안나에게 이 책을 읽으려고 글을 배웠다고, 주인공이 꼭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깨닫는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문제투성이 세상에 하나의 오답으로 남아, 절대 지워지고 사라지지 않고 싶다고. 너무 맑기만 해서 다른 것들은 전부 지워지는 이 시대에 새까만 얼룩으로 남겠다고. 그렇게 얼룩과 오답이 되어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안나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다. 여자이기에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이 시대에서 자신이 얼룩으로 남아 끝까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겠다는 모습.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나이기에 행복하고 충분하다는 모습은 안나의 완벽한 성장을 보여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며 이 시대를 바꿀 것이라는 다짐은 흘리는 눈물을 슬픔이 아닌 깨달음으로 보이게 만든다.

 

 

 

레드북을 읽고 난, 후


 

레드북은 한 여자로 인해 한 시대가 바뀌어가는 모습을 담는다. 전 출연진이 나와서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요, 거짓된 말들이 고요해질 때까지, 더욱 큰 소리로 떠들어요.‘라는 가사를 부르며 박수를 치는 모습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지기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며 얼룩을 남겨댄 사람이 있었고, 그게 바로 안나라는 것을 확 와닿게 만든다.


차별과 편견에 대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시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몸을 부딪히는 주인공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찾아내고 정의하며 펜을 놓지 않는다. 성장은 언제나 눈부시고, 단단한 시대를 깨부수는 여성은 언제나 멋지다. 우리도 각자의 성을 짓고, 옆자리의 여자들과 손을 잡고, 세상을 더욱 시끄럽게 만들기를. 맑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전부 지워버리는 시대에 얼룩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레드북>은 이렇게 용기를 준다. 오답과 얼룩이 되어도 괜찮으니 내 목소리를 내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 되라는 용기. 그게 바로 이 극이 아주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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