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일을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딸에 대하여>는 퀴어 영화이면서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자 사회의 여러 소수자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각 세대가 생각하는 정상성과 그 정상성의 주변에 머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

 

 

[크기변환]KakaoTalk_20251020_212859855_03.jpg

 

 

<딸에 대하여>에 나오는 4명의 여자는 저마다 소외된 자들이다.

 

엄마는 노인요양보호사로 일하고, 남편 없이 혼자 살다가 독립했던 딸인 그린이 집으로 돌아오며 다른 동거인을 마주치게 된다. 딸이 양해도 상의도 없이 데려와 집에서 마주친 레인은 그린의 7년 만난 동성연인으로 얹혀사는 처지에 참 여러 가지로 눈에 밟히는 사람이다. 엄마를 살갑게 대하려 노력하고, 집안일을 꼼꼼하게 하지만 ‘헤어져라’, ‘나가달라’라는 말에는 눈치보지 않고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말한다.

 

딸은 대학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고당한 동료를 위해 부당해고 시위를 하고 있고, 엄마가 도맡아 돌보는 ‘제희’는 나이가 들고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센터에서 눈치를 받으며 다인실로, 다른 센터로 보내진다.

 

갑갑한 현실 속에서 엄마를 더욱 갑갑하게 만드는 건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모든 세대가 정상성과는 조금도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비정규직으로 혼자 살아가는 자신. 후원금이 끊기자마자 무연고라는 이유로 바로 버려진 ‘제희’. 레즈비언이며 애인과 동거하고, 부당한 동료의 해고에 시위를 하다가 다쳐서 돌아오는 딸. 이들 중 엄마가 생각하는 ‘정상가족’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정상성은 모두 허상이지만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홀로 남아있는 여자들 중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은 엄마에게 딸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엄마에게 정상가족은 더 이상 허상이 아닌 눈 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가 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51020_212859855_01.jpg

 

 

남편을 만나 자식을 가지고, 함께 늙어가며 서로 보살피고 챙겨줄 가족이 있는 삶. 엄마에게는 이런 평범함이 없다.

 

제희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져 있다. 치매 노인을 보는 안쓰러움과 지원을 끊어버린 센터 사람들을 대신한 약간의 죄책감, 어쩌면 자신도 나중에는 제희처럼 될지 모른다는 약간의 불안감. 그리고 결혼할 수 없는 그린과 레인에게도 제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엄마가 제희를 굳이 집으로 데려와야만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제희는 어쩌면 나와 딸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홀로 쓸쓸하게 남겨지는 미래, 곁에 아무도 없는 미래, 돌봐줄 가족이 없는 미래.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예전에는 ‘나와 다른 사람’으로 정의되었다면 요즘에는 공고한 내집단을 만듦으로서 안정적인 소속감을 느끼는 동시에 나의 바깥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일들이 많다.

 

<딸에 대하여>의 4명의 주인공 역시 지워지는 소수자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무연고자 노인, 퀴어, 그리고 모두 여성. 여성들은 사회에서 이미 수차례 지워지고 있지만 그 앞에 수식어가 붙는 순간 더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이웃에게 레인을 딸의 친구라고 소개하는 엄마처럼 때로는 아주 가깝거나 사랑하는 자의 존재까지 지워버리게 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51020_212859855.jpg

 

 

하지만 엄마를 잠에 들게 하는 것은 결국 그린과 레인이다. 할머니를 살갑게 돌보는 레인을 엄마는 가만히 바라본다. ‘같이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어서 그냥 계속 같이 있었다.’라고 말하며 엄마의 속을 긁어놓는 딸의 연인은 이 집에 스며들면서 어느새 가족이 된다.

 

서로를 가까이에 두고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흐르고, 할머니가 죽은 후에 장례식장에서 그린과 레인, 그들의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다가 엄마는 잠에 든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함께인 순간을 받아들일 때 엄마는 비로소 편안하게 마음을 놓고 잠에 들 수 있다.


서로의 존재를 마음 깊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들을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관계는 말랑말랑 해진다. 영화 역시 이해를 통한 눈물의 포옹이나 길거리로 뛰어나가 깃발을 들고 혁명에 참여하는 걸 보여주지는 않는다. 곁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대로 두며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소수자들 간의 연대이며 세대간의 통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채로 영화는 끝난다.

 

그린과 레인은 앞으로도 평생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함께 있는 것을 택하며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의 투쟁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엄마는 그들을 그냥 곁에 둔다. 함께 늙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함께 있어야 한다. 곁에 두고 바라보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게 되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서로의 손을 붙잡고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