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 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면, 내가 이 첼로를 보러 가도 좋겠다는 줄기 하나를 뻗어낸 것은 다름 아닌 목차 때문이었다.
드뷔시, 풀랑크, 프랑크.
바이올린과 피아노, 혹은 첼로 소나타를 종종 듣는다면, 얼핏얼핏 악기가 주인공인 공연 포스터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면, 저 세 사람이 그리 낯설게 다가오진 않겠다.
오히려 익숙하다. 편안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아예 누군지 몰라 ‘얘네가 누군데’, ‘〈달빛〉의 걔 아니야?’ 하며 눈만 깜빡깜빡할 수도 있겠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어떨까. 이재리 첼리스트의 금호아트홀 아름다운 목요일 프로그램을 보고 이런 짧은 문장들을 떠올렸다. ‘평온하다.’ ‘보장된다.’ ‘좋네.’
![[연주자 사진] 이재리 Cello ⓒ없음.jpe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05113217_mslmeeke.jpeg)
무엇이 평온한가. 이미 듣기 좋기로 보장된 곡들. 내게는 이지리스닝으로 들을 수 있는, 맘고생 시키지 않는 선율을 만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 저 곡들을 들을 적의 내가 참 평온하겠구나 상상한다.
무엇이 보장되었던가? 이재리와 첼로겠다. 작년이었던가. 관심 있던 첼리스트의 콩쿠르 경연을 살펴보다 이재리 첼리스트의 이름과 얼굴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때도 참 인상 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호아트홀에서 실연을 듣게 되었구나. 맘 편히 기대만 하면 되겠구나.
무엇이 좋더라? 그냥 드뷔시와 풀랑크, 그리고 프랑크가 한 줄로 같이 놓여 있어서 기뻤다. 왜 이리 이 구성이 익숙하지 싶었는데, 정우찬 첼리스트가 같은 자리에서 작년 4월에 같은 이야기로 무대를 올렸더라. 그때는 연둣빛이 참 많이 났는데, 6월에는 무슨 색 조명이 켜질까? 궁금한 일이다.
공연을 기다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미리 곡을 들어보고 그 들려오는 음악에 관해 내 생각을 덧붙이는 것. 그것만큼 공연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 품 안의 추억으로 남기는 방법도 없겠다.
나중에 되돌아보지 않아도 상관없겠다. 내가 겨우 어린아이였구나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을 즈음에나 다시 읽게 될 글들이지 않은가. 그냥 당장 떠올리는 생각을 나열하고, 곧 만나게 될 나무 한 그루와 그 앞의 사람을 기쁘게 상상해보면 좋겠다.
클래식이 어렵다고들 말하지만, 클래식과 눈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비슷해 그리 어렵게 여길 필요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가련히 여기면 그만이다.
나는 그때마다 살아 있는데, 너는 그때마다 사라진다. 아주 작은 연민 하나로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사람이 보이고 작게 흩날리는 색종이 몇 개,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바람이 머문다.
바람. 그래. 바람이 있단다.
어제는 오후가 되어서 비가 왔다. 하루 반나절 넘게 실내에 머문 탓에 꽤 많이 쏟아졌다는 비를 젖은 대리석을 보고서야 알았다. 비가 올 때는, 비가 막 왔을 적에는 내 반곱슬 머리가 부시시해지고, 찌뿌둥한 향기가 도처에 가득하니, 이 날씨와 은근한 거리를 두었다.
오늘은 날이 밝았다. 어제 비가 온 탓인지 긴팔의 아이보리색 니트 가디건을 입어도 덥지 않았다. 그늘이 없는 쪽의 연노란색을 연달아 통과했다. 한껏 고개를 들어 올려 높게 달린 연두색과 초록색이 어려진 나뭇잎을 눈에 담았다. 목선과 양볼 옆에는 바람이 불었다. 파랬다. 바람이 파래졌다.
기쁜 일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재생 버튼 하나를 눌렀다.
드뷔시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L.135
뭐야, 3악장까지 다 해도 거의 12분밖에 안 되는구나. 이렇게 짧은 곡이었어. 일반 가요나 팝송이라면 꽤 긴 시간이겠지만, 20분은 가볍게 넘어가버리는 소나타를 몇 곡 듣다 보니 원래도 긴 것을 좋아하던 기준점이 더 길어진 터라, 15분도 안 되는 시간을 보며 괜스레 아쉬움을 느끼고 말았다.
언제 이 곡을 처음 들어봤더라. 아마 4월의 금호아트홀에서였을 것이고, 정우찬 첼리스트의 공연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는 서울시민예술학교 서초에서의 마스터 클래스였을 것이다. 피아노가 지나간 다음 첼리스트의 첫 선에 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목격한 기억이 난다.
사실 이 소나타를 마냥 감상할 때는, 그러니까 연주자를 목전에 둔 채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놓여 있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소리 혼자 말을 하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글쎄. 그냥 뭐랄까. 악기와 연주자가 음악 안에 모습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더 드러낼 수 있는 곡이라고 해야 할까. 단위별로 표현해내는 곡. 긴 화합보다도 개별마다 즐길 수 있는 포인트가 있고, 노곤노곤한 분위기 안에서 반주 없이 가볍게 흥얼거리듯 노래를 불러주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 그야말로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연주자가 어느 타이밍에 멈춰 설까. 튀어나갈까. 재즈처럼 흔들릴까. 본인을 얼마나 드러내줄지도 관심사겠다.
과연 첼로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게 될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까? 드뷔시일까. 첼로일까. 이재리일까. 아니면 이 곡 앞에 선 나일까. 그야말로 ‘자유’롭게 선택하기만 하면 되니 참으로 흥미롭다.
풀랑크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FP 143
오묘한 매력이 있어 한 가지 맛만 느껴보기엔 아쉬울 때. 한쪽 편만 들기 괜히 싫을 때. 왼편으로 갔다가도 오른편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싶을 때. 남몰래 빼꼼 시선을 맞추는, 사람을 흠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때. 울고 싶진 않은데 괜히 감성적인 쪽으로 빠져버리고 싶은 순간.
유쾌한 일이 없는 네모난 하루에 세로의 재미와 별의 윤기를 더하는. 중요한 순간에 빛 반사 하는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 피아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위로려나. 위안이려나. 조금 전 사근거리던 첼로 한 대가 철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누구의 몸 안에 들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침묵에 가까운 쪽일까. 애타는 마음 안에 숨어 있을까. 풀랑크가 만들고 연주자가 멀리 던져놓은 조용한 실 같은 화살 안에는 어떤 말이 담겨 있을까. 지겨운 마음과 울적한 기분. 무거운 두 다리와 잔뜩 뭉친 어깨를 놓을 수 있도록.
잠에서 깨어나고 마는, 새벽이 다 지나버린 때를 마주해버린 천진한 표정의 소년이 서 있다. 동네에서 유달리 춤을 잘 추는 아이라고 소문이 났다지. 흰 운동화에 긴 양말을 신은 그 움직임만 따라가봐도 좋을 텐데. 생각보다 이별이 빠르게 찾아올 테니, 뒤처지지 않게 소년을 잘 따라가야만 한다.
장난스러운 얼굴과 조용한 얼굴. 달려 나가는 발끝과 다시 멈춰 서는 숨. 들락날락, 요모조모. 느려졌다가, 빨라졌다가, 다시 가만해지는. 재밌겠다!
프랑크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A장조, FWV 8 첼로와 피아노 연주
그냥… 말이 필요할까? 말이 필요할까… 라고만 전하고 싶은 음악이 있다. 바이올린 버전으로 들어도 좋고, 첼로 버전으로 들어도 좋다. 그냥… 태초부터 시선이 가게 태어났다.
웃는 눈 모양이 예쁜 사람.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데워진 잎차 한 잔. 문이 열릴 때마다 딸랑… 소리를 내는 작은 종. 잠깐 머리맡을 기대어봐도 좋을 포근한 흰 베개. 엄마와 맞잡은 오른손. 뭐든 해줄 거라 내뱉어진 귀여운 허세 하나.
발끝에 모인 기다림. 함께 있어 즐거운 오늘. 잊고 있던 내일의 행복. 높게 뜬 하늘 아래에는 인자한 구름 두어 개가 이 악장에 가득할 것이다.
변화를 줘볼까? 흥을 올려볼까? 인생의 재미를 찾아야지. 그날의 첼로가 앞장서줄 거다. 나이를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자꾸만 앞에 서야 하는 일이 많은데, 이럴 때만큼이라도 우리는 뒤에 숨어 있어야 한다. 나의 나태함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나를 기꺼이 방치할 수 있는 자유를 붙잡아내는.
지겨운 인생. 언제든 누구 앞에 서든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나 대신 온갖 감정을 온화한 신경질처럼 대신 내어주는 첼로와 피아노가 한 대씩 있을 것이다. 온갖가지의 감정을 대변해줄 터이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바닥에 주저앉아 다 털어내보면 어떨까? 소위 말해 계급장을 다 떼고, 네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약점이 있는지 다 내던지고, 지금 하고 싶은 말만 우리 솔직히 터놓아보자.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나. 목끝까지 차오르는 그 말 하나는 무엇인가. 유치할수록 좋고, 부끄러움이 느껴져도 괜찮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나를 견뎌내야 해서 부끄러워진다면, 그것도 다행인 일이다.
곁이 외로워질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도 되고, 이것저것 재고 따져야 하는, 솔직하지 못한 순간들이 모두 싫다고 푸념해도 좋겠다. 아이보리색 도화지 한 장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글을 써 내려갈지, 페인트통을 던져버릴지, 단숨에 구겨버릴지. 그 위에 주저앉아버릴지 다 내 마음이다. 다 내 마음이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면,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휴식을 취해볼 수 있겠다. 담백한 맛의 빵 하나에 우유 한 잔을 곁들여보자. 굳이 일찍 일어나 아침 산책을 나가보자. 뻔하게만 느껴지는 일들을 해보자. 할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에, 가장 씩씩한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해낼 수 있는 일을 해봐야겠다.
눈을 뜨면 오후가 금세 찾아올 것이고, 언제나 그랬듯이 달이 까만 밤 한가운데를 차지하겠지. 일상의 즐거움이 내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너보다 훨씬 작은 손으로 부여잡아보자.
아, 바람이 파래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듯이.
![[공연 포스터] 금호아트홀 아름다운 목요일_0611 이재리 Cello.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05112737_rcnyubxc.jpg)
오는 2026년 6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스페셜 콘서트: 2025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박성용 영재특별상 수상자 음악회가 열린다.
이번 무대는 2025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박성용 영재특별상 수상에 따른 독주회로, 첼리스트 이재리가 피아니스트 박영성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 이재리는 프랑스의 정취를 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분위기의 매력을 지닌 드뷔시, 풀랑크, 프랑크의 작품을 선보인다.
■ PROGRAM ■
클로드 드뷔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L.135
프랑시스 풀랑크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FP 143
INTERMISSION
세자르 프랑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A장조, FWV 8
(첼로와 피아노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