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를 끌고 간 영화 3편.
2025년 상반기, 1월부터 6월까지 나를 즐겁게 했던 영화를 꼽아보고자 한다. 기준은 재개봉작을 포함하여 극장에서 본 영화. (그래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제외한다. 사자보이즈의 Your idol이 나의 플레이리스트 상반기 명곡 중 하나를 차지하지만 어쨌든 제외) 후보에는 브루탈리스트, 서브스턴스, 해피엔드, 바빌론, 우리가 빛이라 상상한 모든 것, 콘클라베 등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3개를 꼽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1. <스윙걸즈>, 2004
원래 늘 좋아하는 마음은 벼락처럼 찾아온다. 그리고 그 벼락은 대체로 늘 위험하다. 생각보다 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니까. 같은 의미로 즐거워지는 순간 역시 위험한데, 즐거워진다는 건 잘하게 되었다는 거고, 잘하고 싶어졌다는 거고, 결국은 계속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생각은 없었는데’라는 말이 하나의 밈이 된 세상에서 벼락같이 찾아온 마음은 언제나 나를 예상치 못한 곳까지 끌고 가기 마련이다. 스윙걸즈의 소녀들은 별안간 스윙과 재즈에 벼락을 맞고, 자기들도 모르는 곳으로 다 함께 끌려간다.
그리고 보통 이 정도로 진심이 되면 간절해진다. 처음엔 분명히 ‘보충 수업 듣기 싫어서’였는데, 나중엔 눈물을 흘리고, 컴퓨터를 팔아가며 삐걱거리는 중고 악기를 사고, 알바를 하고, 멧돼지가 나오는 산에서 버섯을 캔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렇게 무모할 정도로 간절하고 그래서 때로는 더 빛이 난다.
이 스윙 ‘걸즈 앤 어 보이’들의 밴드 도전기와 그걸 지켜보는 선생님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유는 성장이 눈에 보이는 순간들 때문도 있지만, 여름을 지나 겨울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사소한 마음이었고, 하기 싫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지,를 생각해 보면 정확한 답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친구들이 함께 있었고, 그래서 즐거웠을 뿐이다. 원래 좋아하는 마음에 시작과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그러게? 왜 그랬지?’가 되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는 점에서 이들이 재즈와 밴드에 느끼는 감정은 단연코 사랑이 맞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빛난다. 내가 이들의 마지막 공연 연주에서 울어버린 것도 빛나는 순간들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눈을 털어내고 무대에 뛰어 들어간 아이들과, 맨 뒤에서 지휘하던 선생님은 결국 모든 관중을 제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치게 만든다.
애정과 열정이 결과가 되어 가닿는 순간은 언제나 짜릿하고 아름답다.
2. <미키 17>, 2025
결국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로버트 패틴슨과 나오미 애키의 아름다움 때문에 두 번 봤다. 봉준호의 세계 중 가장 직관적이고 가장 쉬운데 가장 희망적인 영화가 아닐까. 힘빠지는 결말에 불호를 보인 사람들도 있고, 이용만 당한 SF설정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지만 난 이들이 보여준 삶에 대한 몸부림이 아주 깊게 기억에 남는다.
죽는 것에 익숙해지고, 삶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살고 싶었고 죽는 건 결국 언제나 두려웠다는 것을 인정하는 미키의 모습이 좋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잊혀지거나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라는 게 있고, 그것이 미키에게는 죽음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미키를 더 안쓰럽게 만든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스스로를 우주로 내쫓았고, 거기서도 죽지 못해 매 순간 다시 태어나고 있으며, 그것조차도 아주 성실하고 거대하게 삶을 향해 몸부림치는 것임을 모르는 미키.
그리고 그런 미키를 살게 만드는 것은 미키18과 나샤다. 삶과 사랑을 붙잡아 17번째 미키를 살게 하는 존재들. 18번째의 미키는 레드버튼을 눌러서 내 인생이 망한 채로 여기까지 굴러왔다고 말하는 17번째의 미키에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말한다. 어차피 다시 태어날 거니까 미련 없다고 생각하던 17에게 아닌가, 어쩌면 나는 살고 싶었나? 질문하게 만드는 것 역시 18번째의 미키다.
합의도 없이 잘못 태어난 주제에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네가 죽어야지 않겠냐고 말하던 미키18은 과거에 머물러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곱씹던 17번째의 미키를 구한다. 우리의 인생이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건 그럴 수도 있던 일이라 말하면서.
그리고 미키17의 곁에는 나샤가 있다. 내가 1번이든 14번이든 17번이든 18번이든. 매번 조금씩 변하는 나를 매번 사랑하는 사람. 죽으면 매번 다시 태어나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같이 늙어갈 생각에 기뻐하며 엉망진창인 삶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
결국 나를 구하는 건 나 자신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건 사랑이고.
봉준호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 남자 주인공을 등에 업은 채 맨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 처음 아닌가?!
3. 씨너스: 죄인들
돌비에서 보세요, 음악이 진짜 좋아, 절대 스포 없이 봐라, 영화를 보기 전 들은 모든 당부사항에도 불구하고 아이맥스를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지만 흑인 차별의 역사와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에 대해 조금 더 해박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빌론 같은데?! 라고 외친 6월 12일의 내가 생각난다. 이 영화가 100만이 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진지하게 고찰했지만 아무도 답을 찾지는 못했다.
카포네의 도시인 시카고에서 갱단으로 일하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스택과 스모크 형제가 흑인들을 위한 주점을 열고, 그 주점의 오픈 첫날 밤 펼쳐지는 이야기... 인데, 분명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스릴러고, 뮤지컬인 동시에 아주 끈적하게 골때리는 영화다. 부천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틀었으면 아주 난리가 났을 법한 영화라고 해야 하나. 고전 블루스와 흑인문화 감성을 영화의 주제 의식으로 굵직하게 뿌리내린 후에 그 위에 흡혈귀와 액션을 끼얹었다. 그래서 흡혈귀들도 기타를 치며 아주 감미로운 아카펠라를 선보이고, 몇십 년 후에 죽지 않은 흡혈귀가 된 스택은 새미를 찾아와 예전에 불렀던 블루스를 다시 연주해달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한 전개 속에서 좋은 노래들이 러닝 타임을 내내 채운다.
씨너스는 흡혈귀 소재를 백인과 흑인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흘러가게 두지 않는다. 흡혈귀인 레믹은 아일랜드인이며 반식민주의자다. 아일랜드 이민자로서 민속음악을 부르고, 모두가 뱀파이어가 되어서 평등한 삶을 만들 수 있게 자신이 이들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1930년대 흑인들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으레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는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보이고, 영화에 반전이 나타나기까지 이들은 주점을 열 준비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차에 타서도, 기차역에서도, 함께 모여 파티를 벌이는 주점에서도. 외부와의 대립이 아닌 그들끼리의 즐거운 멜로디로 영화는 가득 차 있다. 이 멜로디는 영화 속에서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뛰어넘는 힘을 가진다.
이 영화에서 ‘죄인’은 단정지어진 사람들이다. 흑인들, 흑인 중에서도 클럽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공동체 속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해방을 맛본다. 동시에 사람을 죽이고, 통용되지 않는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죄인인 동시에 인간이다. 폭력과 갈등이 가득 찬 영화 속의 흑인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자유와 생명력이다.
씨너스는 관객을 음악과 밤에 취하게 만드는 영화다. 악마와 흡혈귀를 불러내는 음악일지라도, 씨너스의 블루스 음악들은 생명력을 가지고 폭발하며 결국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