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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Q.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이 말의 최초 발화자가 궁금해서 인터넷 창에 검색을 해봤다. 뭐든 알려주는 인터넷 속에 특정 인물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기다림의 의미와 감정적 영향, 긍정적 측면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스크롤 이후에 등장한 것은 빠지면 섭섭한 ‘지식in’코너. 짝사랑에 대한 기다림의 고통을 토로하는 이부터, 기다림의 기간을 물어보는 이, 기다림의 주체를 따지는 이까지.

 

‘기다림’에 관한 건 아직도 인류가 해결해내지 못한 이슈인가보다. 괜히 위로가 됐다.


몇 달 전까지는 기다림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일상’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어렸을 적 할머니네에 있을 때 엄마를 기다렸던 일,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일, 좋아하는 계절을 기다리는 일, 면접 순서를 기다리는 일, 대학 입시 결과를 기다리는 일, 알바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일, 축제를 기다리고 오지 않을 것 같던 종강과 방학, 먼 휴가를 기다리는 일, 그리고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정처 없이 기다리는 일 같은 것들. 매일 일어나지 않아 날짜를 세게 만드는 그런 특별한 일들만 ‘기다림’인 줄 알았다.

 

그 의미가 바뀐 건 아마 그 기다림이 일상으로 침투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제3자의 시각을 가지고 엄마를 바라보면서부터. 동생이 군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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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크지 않을 것 같던 동생이 제대로 된 성인식을 치르러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슬프지 않았냐고? 무심한 누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그랬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걱정이 안 돼서. 그리고 안타깝지만,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피할 수 없으니까! 학교 선배들도 친구들도 비슷한 시기에 보낸 후라 아주 예상 못한 일도 아녔서 크게 놀랍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보단 다녀온 뒤 동생의 모습이 기대됐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내가 ‘엄마’가 아닌 ‘누나’이기 때문이겠지. 내 몸 아파 낳아서 나의 일부분을 떼어 준 자식을 힘든 곳에 보낸다는 것에 기뻐할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나의 엄마는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여리다.

 

군대에 들어가기 몇 주 전, 동생은 전국방방곡곡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그 떨어짐으로 미리 엄마를 단련시키려는 것인지 본인의 버킷리스트였던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시기부터 엄마의 눈가가 촉촉해진 일이 잦았다. (아마 한참 전부터였을 수도 있지만)

 

동생의 여행 중에 다 같이 경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자취를 시작한 언니를 동대구역에 내려주고 동생을 대구에 내려주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엄마는 서러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꼭꼭 숨기는 것보다는 울 수 있을 때 되도록 우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엄마의 눈물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망의 입대날, 역시나 엄마의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 시기로부터 한 달 뒤에나 동생을 볼 수 있었다.


그 날로부터 엄마에게 기다림은 일상이 되었다. 어느 날은 하루 온종일 일만 하기도 하고, 저녁에는 아빠와 체육공원에 올라 운동을 하는 루틴도 만드는 등 내 생각보다는 잘 버티고 있어서 어느 샌가부터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이 줄었다. 역시 여린 엄마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홀로 많은 눈물을 훔쳤겠지. 우는 걸 매번 들키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나는 적당히 모른 척을 했다.


군대는 보고 싶을 때 보러 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 기다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니까.

 

선택할 수 없어 필수적으로 기다리는 안쓰러운 엄마 곁에서 자연스레 ‘기다리는 마음’을 생각했다.

 

한 달이 지나 다가온 동생의 훈련소 수료식 전날, 낮에 켜진 주방의 불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꺼졌다. 장장 9시간 동안의 도시락 싸기 전쟁 끝에 엄마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훈련소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한 달 만에 마주한 아들 상봉의 시간.


(슉-.)

 

꿈같았던 8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동생을 다시 들여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 뒤자석에서 어렴풋하게 본 앞좌석의 엄마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그 손수건이 축축했으려나. 다시 엄마의 기다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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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기다림이 끝나면 재빠르게 다음 기다림이 시작된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이 여기도 적용되나 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의 일상도 그랬다.

 

시든 꽃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일, 라이팬에 두른 기름이 달아오르길 기다리는 일,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 미용실에서 머리를 바꾸는 친구를 기다리는 일,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일, 불쾌지수를 높이고 싶지 않아서 퇴근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는 일, 들뜬 마음으로 주문한 닭발을 세팅하고 아빠를 기다리는 일, 웃긴 영상을 보내고 친구의 답장을 기다리는 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 일, 로또에 당첨되기를 기다리는 일, 찜을 해놓은 상품 가격이 내리길 기다리는 일, 좋아하는 웹툰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일, 보고 싶은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 기다림이 끝나는 일을 기다리는 일.


이게 전부 오늘 하루 치의 기다림이라니.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니라, 기다림 그 자체잖아?'


 

아주 기대했던 순간도, 그래서 아주 행복한 순간도 결국 기다림의 결과이다. 그래서 기다림이 열매를 맺는 달콤한 순간은 아주 짧지만, 그 후에는 또 새로운 기다림이 찾아온다. 언제 또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기다림은 대게 지루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그 기다림을 어떻게 보낼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내세우며 말하길, 인간은 정해진 본질 없이 세상에 던져 졌으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미와 본질을 만들어가고 그 자유는 불안과 책임을 동반한다고 한다. 순서를 바꿔 생각해보면, 불안이라는 건 인간의 자유가 만드는 것이니까 그 불안을 통한 본질 또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바꾸어 갈 수 있지 않은가?

 

사실 기다림이라는 건 언제 끝날지는 물론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끝이 나고서야 겨우 알게 되겠지만, 그 기다림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 그게 사람일지, 사물일지, 세상 어떤 것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우선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기다림은 아침으로 먹을 엄마표 소풍 김밥에 대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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