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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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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깬다는 표현은 ‘브레이킹 아이스’보다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주로 사람 간의 만남이나 관계에서 딱딱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하는 일련의 행위를 뜻하는 말.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깨고 새로운 공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얼음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깨야 하는’의 대상으로 의미가 있다. 어차피 깨져야 하는 피조물이 숙어의 메인 워딩이 된다는 것은, 깬 후의 상황보다는 깨는 것 자체의 행위에 더 큰 방점을 찍는 것 같은 메타포로 느껴진다.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역시 얼음을 깨는 사람들이 나온다. 나나와 샤오는 연길에 산다. 연길은 얼음으로 둘러싸인 지역. 차갑고 얼어붙은 환경에서 누군가는 얼음을 긁고, 누군가는 얼음에서 계속 미끄러지며 떠돌며 산다. 하오펑은 이런 연길에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방문했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리며 예상치 못하게 연길에 머무르게 되는 인물이다. 하오펑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얼음을 씹어먹는다. 아그작, 아그작.

 

겨울에도 브레이킹 아이스를 하는 낯선 이 하오펑을 나나와 샤오가 만나며, 이 셋은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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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청춘인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의 조합은 영화 씬에서 신선한 조합은 아니다. 고전 작품에 <쥴 앤 짐>이 있고, 몽환에 파격을 더한 <몽상가들>이 대표적이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그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으레 이러한 셋의 조합에서 나올법한 자연스러운 감정선과 엇갈림이 존재하고, 어긋나는 사랑과 욕망이 드러난다. ‘방황하는 청춘’이라는 이름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과감함과 모호함이 어색함 없이 그려진다.

 

안소니 첸 감독은 보라색 청춘을 담은 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할 수 있을만한 것을 그대로 주되, 소재 부분에서 차별화를 주는 시도를 했다. 감독은 공식 인터뷰에서 <브레이킹 아이스>를 통해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여름만 존재하는 싱가포르에서 살던 그가 겨울을 배경으로 선택했고, 그냥 중국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이 존재하는 조선족이 사는 연변의 연길을 선택했다.

 

상징이나 비유를 복선이나 물건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설화로 주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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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단군 설화를 선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극 중 샤오는 하오펑과 나나에게 단군 설화를 들려준다. 하늘에서 내려운 환웅에게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동굴에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이것만 먹으며 견디라고 말한다. 그러나 호랑이는 중간에 포기했고, 곰은 이를 견뎌내어 사람인 웅녀가 된다는 이야기. 한국인 중에 단군 설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 고조선의 시초인데 모를리가 있나. 반면 중국 영화인 <브레이킹 아이스>는 이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극 중 캐릭터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 반응이다.

 

연길에서 살며 조선족과 중국인 사이에서 정체성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샤오와 나나, 한국인 부인을 맞이한 조선족 친구의 결혼식에 방문하여 같이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는 하오펑. 삶의 의미와 무력함 속에서 휘청이는 셋. 나나가 웅녀인 듯한 연출을 통해, 모호한 청춘을 민족적인 의미로도 덧대어 비유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청춘을 다른 방식으로 빗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중국 콘텐츠에서 진정한 예술을 그리고자 한다면, 동북공정 앞에서 적극적 세심함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예술인의 책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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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킹 아이스>는 결국 서사보다는 기분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 영화다. 얼어붙은 청춘들의 공허함을 물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그려내고자 한 감독의 실험정신을 인정한다. 특히 설원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촬영 기법은 영화의 가장 돋보이는 점이었다. 영하 18도의 연길 설원을 롱테이크로 담아낸 장면은 미장센으로 관객의 눈과 귀를 트이게 해주었다.

 

주연 배우 셋은 이 영화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자칫 어색하거나 너무 무감해보일 수 있는 캐릭터인데, 각 캐릭터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흡입력을 지닌다.

 

배우들의 즉흥적 연기는 영화의 현실감을 살리는 데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나나 역을 맡은 주동우가 친구에게 과거를 털어놓으며 우는 장면이나 샤오 역의 굴초소가 눈밭에서 혼자 콜라를 마시던 장면은 미묘한 청춘의 불안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으며, 입 속의 얼음을 빼서 바라보며 눈물과 겹치며 흐르는 시퀀스를 훌륭하게 소화해 낸 샤오펑 역의 류호연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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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는 얼음을 긁는 사람이고, 하오펑은 얼음을 깨는 사람이고, 샤오는 얼음에 미끄러져 살다가 결국 그 얼음을 깨고 나오는 사람이다. 나나에게 ‘브레이킹’ 아이스는 얼음에 발자취를 남기며 긁는 것이고, 하오펑에게 브레이킹은 입 속에서 깨부수는 것이며, 샤오에게 브레이킹은 그 곳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흥미로운 결말이다. 갑작스러운 성장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인생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단 한 번의 깨달음이 삶의 변곡점이 되는 것.

 

아슬한 청춘 영화는 언제나 스테디이자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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