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퍼니사이코픽션_표지띠지.jpg

 

 

베스트셀러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발굴해 낸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박혜진이 현재를 생생하게 예견한 한국 단편소설 7편 속에서 ‘병든 사람들’을 발견하고 해설을 덧붙인 소설집 <퍼니 사이코 픽션>이 발간됐다. 해당 작품은 출간 전 펀딩 225%를 달성하며, 획기적이고 독특한 기획으로 독자들의 기대감을 모았다.


이른바 ‘피폐 소설'이라는 장르를 전면에 내세운 이 소설집은, 하나같이 미쳐 있는 인물들이 등장해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퍼니 사이코 픽션> ‘비틀어진 내면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 세기말 소설을 발굴하겠다’는 의도 아래 시작되었다. 소설집에 수록된 이야기는 모두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소설들이다. 20여 년 전에 쓰인 소설이 현대 사회에 빗대어 보아도 어색함이 없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양극단에서 시작하는 작품


 

소설집은 초반부부터 기강을 제대로 잡는다. 수록된 첫 번째 소설과 두 번째 소설이 <정열>과 <식성>인데, <정열>의 테마는 ‘잘 안 변하는 사람'이고, <식성>의 테마는 ‘너무 쉽게 변하는 사람'이다. 정반대의 주제 의식을 지닌 두 강렬한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이 소설집의 성격을 파악한다. 포문을 열기에 아주 좋았던 두 소설이었다.


 

관에서 죽은 아이의 심장을 파먹고 있다…….

우리가 왜 그때 셋 다 크게 당황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p50, <식성>

 

 

두 소설은 하나의 명제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사랑에 대해 온 마음과 몸을 바쳐 타오르지 않으면 직무 유기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적당한 선을 넘는 순간 귀찮은 감정으로 치부한다. 누군가는 고기 없이는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채식을 진정한 가치로 여긴다. 어쩌면 극단적인 모든 유기체가 모여 사는 세상 속에서, 나와 극단적으로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을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의 불씨에 분신(焚身)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과, 사랑을 비롯한 모든 관계에서 늘 솔직하지 못한 사람. 어쩌면 우리 모두 한 번쯤 겪은 감정일 것이다. 육식을 즐기다가도 가끔 고기 냄새에 역함을 느끼고, 채식에 관심이 없다가도 건강한 식성을 선택하게 되는 것. 그 역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경험이다.


결국 이 책은 극단적으로 다른 상황에 있는 두 사람을 보여주며, 그들이 어떤 사고와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 내면에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에도 끊임없이 질문한다. ‘평생 고기만 먹고 살기 vs 평생 채소만 먹고 살기'처럼 극단적인 밸런스 게임을 문학과 이야기로 물어보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친'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여 돌아버린 선택지를 제시한다.

 

 


가해자의 피해자화


 

<나비>, <마녀물고기>, <상자 속으로 사라진 사나이>와 <그녀는 죽지 않았어>를 읽은 후에는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가해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으며,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 자신의 시선대로 남을 재단하고 파악하고 결국 합리화하는 사람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나비>와 <상자 속으로 사라진 사나이>의 두 남자는 망상의 끝에 다다라 결국 스스로가 망상의 세계에 가둬진다. 투영의 끝에서, 진정 자신이 보고 믿는 그 세계의 끝에 도착한 것이다. 그 순간, 읽는 독자는 헷갈린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국면에 들어선 순간, 여전히 이 인물을 가해할 만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냐는 생각인 것이다. 불가해한 가해자라는 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


반면, <마녀물고기>와 <그녀는 죽지 않았어>의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두어버린다. 앞서 말한 작품의 두 남자는 ‘가둬진' 것에 가깝다면, 이들은 좀 더 능동적이라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가 줄어든다. 독자는 등장인물과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게 되고, 그런 면에서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기보다는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다. 크게 보면 가해자 역시 상실을 했다는 점에서 엄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찝찝한 권선징악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p137, <마녀물고기>

 

 

이 네 개의 소설은 모두 1인칭의 함정을 흥미롭게 풀어낸 소설들이다. 전지적 시점이 아니기에 우리는 제한적 정보를 통해 중심인물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미친 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승화하든, 미친 인물과 거리를 두고 이성적 판단하든, 결국 생각할 여지와 질문의 꼬리표가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퍼니 사이코 픽션>만의 힘이 아닐까 싶다.

 

 

 

광기와 진실의 창


 

그런 면에서 마지막 <댈러웨이의 창>은 감정 위주로 흘러가던 앞선 소설들에 비해 주제 의식이 더 돋보이는 글이었다. 앞선 이야기들은 미친 사람들이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상식의 범주가 아닐 정도로 광기는 있을지언정 음흉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너무 직선적이고 투명하기에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소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소설이다. 누군가를 속인다는 것. 그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경험. 해당 작품은 딱 2000년에 공개되었는데, 25년이 지난 현재 사회에 빗대어 보아도 시사성이 있는 소설이었다. 왜 세기말 소설을 모아서 2025년에 기획을 했는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었으며, 그렇기에 소설집을 닫는 작품으로 트렌디했다.

 

 

창은 진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p247, <댈러웨이의 창>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따르면, 광기는 사회 속에서 은폐된다. 광기 있는 자는 낙인찍고, 이 사회에서 배척시키고, 그렇게 광기가 있는 자들을 눈에서 안 보이는 곳으로 몰아낸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배제가 익숙해져서 오랜 시간 창을 닫게 되면, 우리는 광기가 없는 사회에서 산다고 믿게 되며, 그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는 오히려 광기가 없는 인물이 광기라고 생각할 정도로 척박하다. 마지막 <댈러웨이의 창>에 등장하는 차라리 앞선 소설의 광기 있는 자들이 좀 더 이해되기도 했다. 거짓보다 광기가 더 솔직하지 않나. 광기를 숨길 수 없는 사람과 흑심을 숨기는 사람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이 책의 방식처럼 굳이 극단적인 밸런스 게임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전자를 고르지 않을까.


 


퍼니, 사실 낫 퍼니 사이코 픽션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이 <퍼니 사이코 픽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픽션이 논픽션으로 느껴지는 사회 속에서, 이런 인물들에 이입하는 내가 사이코같고, 이 상황 자체가 퍼니, 사실 낫 퍼니(웃겨, 사실 안 웃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퍼니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낫 퍼니한 사회를 비춰보는 것.

 

 

사이코로 통칭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저마다의 은유인바, 내가 이 책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 사람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이상함 속에서 내가 먼저 읽은 것은 낯설지 않은 내 모습이었다.


p288-289, 에필로그

 

 

개인적으로 <정열>에서 말한 사랑론을 보며 한때 ‘어떤 게 사랑이야? 이것도 사랑이야? 아니면 이런 게 아니어도 사랑이야?’라며 친구들과 열변을 토했던 지난날의 내가 생각났다. 물론 아직도 정답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이란 199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똑같은 주제로 얘기할 수 있는 소재일지 모른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육식주의자> 버전이 <식성>이 아닐지 생각하며 읽기도 했다. 남성 지배와 억압적 정체성에 대해 논했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의 주제 의식이 맞닿아 있다고도 느꼈다. 결론 역시 그 생각에 힘을 실어줬다.


<퍼니 사이코 픽션>은 문장보다는 기획이 참신한 작품이었다. 실패한 갈망, 망한 성장, 부서진 구원. 피폐하다고 누군가는 치부할 것들을 나서서 기획한 클레이하우스의 신선한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라는 말처럼, 이 병든 사회를 쓴웃음으로 씹어낼 수 있는 피폐 소설들이 더욱 많이 생겨나기를.

 

 

 

20250302112351_pbbskoou.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