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그림 작가가 된 지도 1년이 넘었다. 가끔 글과 그림 중 무엇이 우선인지 스스로 묻는다. 정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인지라 매번 꼬리를 물곤 했다.
'글과 그림을 뒤섞어 놓을 수는 없을까?'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이 질문은 나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작품의 바로 옆에 글을 가져다 두려 하니 왜인지 딱딱한 캡션처럼 느껴지고, 글을 빼고 그림만 두자니 작품에 장벽을 스스로 쌓는 행위를 하는 듯했다.
끝내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나는 글과 그림을 완전히 분리하는 선택을 했다. 글과 그림이 서로 맞물려 어울리는 것, 그 이상과도 같은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는데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전시 내내 정의할 수 없었던 이름 모를 막막함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책을 만난 덕분이었다.
나의 작품을 '출판'한다면 어떨까?
나의 작품과 '그림책'은 거리가 멀다고 은연중에 생각해 왔다. 그림책은 '아이들만의 것'이라는 편견이 이제껏 한 구석을 자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책은 '글'과 '그림'의 조화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매체일지도 모른다. 그림책은 '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형식을 가지지만, 활용 방식에 따라 가장 자유로운 매체가 될 수도 있다. 다른 매체와 다르게 크기와 비율,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읽었던 그림책에서도 다양한 개성을 담은 책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림책이 소설책과 구분되는 점은 그림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영화와 구분되는 점은 소리와 움직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120~121p)
프레임을 넘나들며 항해하는 나의 그림들을 상상해 본다. 소설이 된 나의 이야기 속 삽화가 된 그림, 웅장한 사운드 아래 내일로 흘러가는 나의 그림, 글과 완전히 하나 된 채 페이지를 누비는 그림…. 모든 매체를 아우르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있지만, 당장의 품속 세계를 가장 존중해주는 수단은 그림책인 듯했다. 새로운 다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중간중간 뚫린 빈칸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출간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중간중간 등장하는 과제에 나의 이야기를 대입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보통의 책은 저자의 지식을 나눠주는 데에서 그치지만, 이 책에서는 실천 방안을 제안하며 독자를 다독인다. 앞으로 나만의 작가 노트, 나아가 나만의 글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든다.
그림책 너머, 글과 그림 사이
엄밀히 말해 그림책이라는 장르의 문법을 보다 잘 구현하는 그림책이란, 그림이 곧 이야기 전개 주체가 되는 그림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시도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합니다. (9p)
어느 관람객분께 한 질문을 받았다.
"작가님께서는 글을 먼저 쓰시나요, 그림을 먼저 그리시나요?"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저는 항상 글이 먼저예요."
물론 그림이 먼저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낙서처럼 흩어진 단어들에서 건져 올린 결과물이었다. 그 질문에 답하면서도 규칙처럼 굳어진 작업 방식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가끔은 글로 적어놓은 것을 그림으로 구현하지 못할까 걱정이 앞설 정도니, 나는 여태껏 '글'이 우선인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열을 매길 수 없는 것에 우선을 부여한 것은 아닐까.
책에서는 글과 그림의 관계를 다양하게 제시하며 시야를 넓힌다. '상호 보완의 관계', '서로가 서로를 불가피하게 변화시키는 관계' 등 여러 예시를 들며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그림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얼마든지 나의 작품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림책에서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림이지만, 다른 매체에서까지 그림이 우선이라는 법은 없다. 명확하게 글이 우선인 다른 매체들과, 그림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그림책의 사이에서 나만의 균형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그림책 출간을 위해서라도, 현재의 이야기를 위해서라도 나는 '그림'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윤 더미북(*그림책을 정식 출간하기 전에 만드는 가제본)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다 보면 끝이 없고, 그렇게 되면 그림책 출간과 생계는 점점 상관없는 일이 되죠.(...)
이 저는 작가가, 태어날 만한 어떤 그림책을 그려야 하는 수행자일 뿐인 것처럼 느낄 때도 있어요.
(42p)
'글과 그림을 뒤섞는 것'
책을 다 읽고서 그 해답을 찾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책 한 권으로 끝맺을 수 없는 질문일뿐더러, 어쩌면 평생의 고민거리로 따라다닐 과제일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비슷한, 때로는 같은 고민을 나누는 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나는 글과 그림의 관계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었고, 그림책은 그에 관한 힌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책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나조차도 몰랐던 질문 한 문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호기심을 이제 내일로 삼아보려 한다.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내겠다는 마음, 그리고 글과 그림을 어우러지게 구상하는 일. 나는 새로운 오늘을 안고 다시 다음으로 넘어가려 한다. 그 품의 한편에 이 책을 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