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차가운 여름을 보냈다. 1순위로 여겼던 것이 더 이상 1순위가 아니게 됐다. 아끼던 취미가 일이 됐다. 내게 첫 영감을 주었고, 가장 자랑스러웠던 무대 위 꽃에게 더는 물을 주지 못하게 됐다. 어릴 적 꿈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목표가 지워졌다.
지금껏 '간절함'에서 비롯된 열정으로 삶을 일궈 왔다. 그로 얻은 결과까지 진정으로 나의 몫이라 믿었다. 최선을 다한 경험은 다시 시작할 용기가 되어주었고, 마음이 가는 대로 여러 활동에 지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지원하는 족족 낙방했다. 나의 노력으로 새겨진 서류들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흩어졌다. "지금까지 네가 이뤄온 것들은 여기서 하나도 통하지 않아."라고 세상이 내게 외치는 것만 같았다. 점점 '간절함'은 내가 가진 먼지 조각마저 앗아갔다.
그러던 와중 반가운 단어를 만났다.
'버킷리스트'
세계 일주, 패러글라이딩, 몽골 초원에 드러누워 밤새 별 보기, 오로라 보기, 나만의 작업실 갖기….
어느 순간에 묻혀 사라져 버린 문장들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지친 하루살이에 짓눌렸는지, 스스로 짓밟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망들을 잊고 살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이들 중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아마 앞으로 남은 20대도 그 얼룩들로 가득해질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죽기 전에 아이유 콘서트 가기"
그 당시 나에겐 공연 하나조차 큰 꿈이었기에, 멀리서만 그를 응원해 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도조차 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큰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이미 대부분의 좌석이 매진된 상황에서, 희박한 확률을 안고 티켓 예매에 뛰어들었다. 공연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어릴 적 우상을 만나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나를 설레게 했다. 그저 남 부러운 일이라 여겼던 일이 현실이 됐다. 공연일까지 남은 약 한 달의 시간을 온전히 공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보냈다. 응원법을 외우고, 응원봉을 사고, 당일에 아프지 않기를 기도하며 컨디션 관리에 매진했다. 그리고 약속한 그날이 밝았다.
하늘 위에는 드론을 수놓고, 화려한 폭죽으로 장식하며 그가 꿈에 대해 노래를 불러주었을 때, 지금을 평생 잊을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 모를 벅차오름에 왈칵 눈물이 났다. 그 감정에 뒤늦게 '소중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공연의 장면과 그 속의 나, 가능한 한 오래 그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그때 나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 문장이 들어왔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 감정은 여러 공연장을 드나들게 된 계기가 되어주었다. 공연이라는 게 이렇게 재미난 것이었는지 몰랐다. 지금껏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전부 시시하게 느껴질 만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영원히 다시 느낄 수 없을 순간의 감정을 찾아 헤맨다. 같은 셋리스트와 같은 연출일지라도 그날 날씨와 그날의 관객, 그날의 가수에 의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변수를 사랑한다. 네모난 스마트폰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서로로 인해 울고 웃는 우리가 있다.
잘 가, 내 오랜 여름아
1년 전의 기억은 다시 나를 현장으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정말 못 갈 뻔했다. 작년의 기대감으로 간절한 마음이 너무 커져서였을까? 주어진 두 번의 기회를 다 쓰고도 티켓을 얻지 못했다. 간절함이 또 나를 괴롭혔다. 체념한 채로 며칠간 예매 창을 들락거렸다. 그때 거짓말처럼 취소 표의 행운이 다시 찾아왔다. 마음을 내려놓자마자 켜진 네모난 불빛이었다.
오프닝부터 순간에 머물 감정을 찾았다. 꽃잎처럼 휘날리는 컨페티 사이로 기다림의 이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바다 위로 노을이 지듯,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이 여름이 그녀의 '바이, 썸머' 한 마디에 끝이 났다. 도전하는 만큼 주저앉았던, 또다시 간절하고 말았던 계절의 기세가 한 방 꺾였다.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신세를 졌다. '아이유'라는 세 글자는 이제 내 마음속 가장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간절함'은 더는 나의 무기가 되어주지 못할 것 같아
내 삶의 안정이 무너지고 불확실함이 커져 갔을 때, 나의 마음에 '간절함'이 들어왔다. 그는 꿈 없던 내게 강한 동기를 부여했고, 내일을 위해 오늘 참아야만 하는 이유를 댔다. 그 덕분에 원하던 것을 이루었냐 묻는다면, 전혀 이루어진 것이 없다. 원하던 대학에서 백의 자리 수 예비 번호를 받고, 원하던 학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에너지로 차라리 다른 걸 하지 그랬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모두가 꿈을 크게 가지라 해서 그리했건만, 나조차 나를 돌보지 못했다. 끝내 건강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된 열아홉 살짜리 하나가 서 있었을 뿐이다.
우연히 마주한 얼굴, 우연히 손에 들어온 취소 표, 우연히 받은 위로…. 그렇게 우연히 그린 선들이 오늘을 만들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덤빈 것들은 나의 손에 들어오고, 이 한 몸 바쳐 다가가면 매몰차게 굴러떨어졌다.
나의 바람들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영영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간절히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도,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없다. 아주 조금은 지쳤다. 그럼에도 매일 죽지 않을 만큼만 노력하기로 했다. 내 것이 되지 못한 일에 마음껏 실망하고, 또 그 실패를 동기 삼아 나아가는 것. 지루한 하루를 반복하다 보면 뭐라도 이루어져 있겠지. 또 잊고 살아가다 보면 마주칠 수 있겠지.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 바람을 따라 나부끼다 보면, 툭툭 살다 보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떠난 적 없는 그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