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불교 박람회에 다녀왔다. 평소 종교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불교’라는 단어가 주는 고요한 울림에 이끌렸다. 행사장에는 다양한 불교 용품이 가득했고, 생각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전통적인 사찰 풍경, 염주, 불화 같은 익숙한 이미지뿐 아니라, 요즘 감성에 맞춘 굿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엽서, 요가와 명상을 위한 소품, 일상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향과 티 제품들까지—불교가 단순한 신앙의 틀을 넘어, 현대인의 일상 속에 스며든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불교를 처음 가까이하게 된 건 우연히 접한 유튜브 영상 때문이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토로했고, 스님은 단순하지만 깊은 말로 그 마음을 마주해 주었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말.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을 조용히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불교는 내게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삶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수행’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내 삶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건.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는가. 슬픔이나 분노, 실망 같은 감정은 나약함의 증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 감정을 애써 밀어내고, 때로는 부정하거나 모른 척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감정을 통제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화를 낸 뒤에야 내가 화가 났다는 걸 자각하고, 마음이 다친 뒤에야 내가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채는 일. 나는 그렇게 늘 한 발 늦게서야 나 자신을 마주했다.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감정은 내 안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 흐름에 휩쓸리며 방향 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연습하듯 알아차리기를 시도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감정이 올라오는 찰나를 포착하려는 노력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언제나 늦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돌아보는 연습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주 짧은 틈이 생겼다. 말이 나가기 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문득, ‘아, 내가 지금 서운하구나’, ‘조급해졌구나’ 하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알아차림은 나를 멈추게 했고, 멈춤은 받아들임으로 이어졌다.
그 알아차림은 나를 멈추게 해주었고, 멈춤은 곧 받아들임으로 이어졌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 서운한 마음을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 하고 분석하기보단, 그냥 ‘그럴 수 있지’ 하고 품어보는 일이다.
이 단순한 문장, ‘그럴 수 있지’는 내 수행의 또 다른 축이 되었다. 타인의 행동이나 말,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과거의 나는 이유를 따지거나 나름의 해석을 하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한 한 판단을 유보하고, 나도 그렇듯 타인도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럴 수 있지'라고 스스로 중얼이는 순간, 불편한 감정의 파고가 조금은 잦아드는 것을 느낀다. 상대를 위하려는 배려라기보다, 그 마음을 붙들고 계속 괴로워하는 나를 놓아주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다.
결국 내가 불교의 교리와 수행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그리 거창하거나 고결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였다.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나 스스로의 감정에 지치지 않고 살고 싶었다. 그렇게 보면 꽤 이기적인 동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행이 내 삶에 조금씩 평온함을 더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수행은 어떤 거대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고 품어주기 위한 일상의 작은 노력들로 이루어진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럴 수 있지’ 하고 말해주는 일. 그건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자, 아주 사적인 수행의 형태다.
불교는 내게 신념이 되기보단 태도가 되었다. 잘 살아내기 위한 기술, 흔들림 속에서 나를 중심에 놓는 연습. 그렇게 오늘도 나는 잠시 멈춰, 조용히 마음속에 되새긴다.
“받아들이고, 알아차리기. 그리고, 그럴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