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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나는 소위 말하는 ‘문덕’, 문구 덕후다. 내 책상 서랍 한 켠에는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떡메모지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예쁘고 귀여운 문구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건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한창 다이어리 꾸미기에 빠졌을 땐, 매 페이지를 정성 들여 쓰고 꾸미는 게 하루의 루틴이었다.

 

가위로 자르고, 풀로 붙이고, 색감과 배치를 고민하면서 다이어리 한쪽을 채우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당시엔 ‘이게 뭐라고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싶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꽤 소중했다. 그때부터 문구는 내게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라, ‘기록’과 ‘취향’의 도구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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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2025 인벤타리오 문구 페어> 소식을 들었을 때, 망설임 없이 첫날 방문을 결심했다. 이번 행사는 29CM와 Point Of View가 함께 기획해 4월 2일부터 6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렸다.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인벤타리오(inventario)'는 이탈리아어로 '목록', '기록'을 뜻하는 단어인데, 왠지 이번 행사의 정체성과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행사장은 입장부터 북적였다. 첫 회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문구 덕후들의 정보력과 집결력은 대단했다. 부스마다 긴 줄이 이어졌고, 인기 브랜드에는 물건이 동나는 속도도 꽤 빨랐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보았다.

 

천천히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구는 결국, 사람의 취향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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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브랜드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생각보다 훨씬 진하고 깊었다. 그냥 예쁘고 귀여운 물건이 아니라, 브랜드를 만든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관찰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단순히 제품만 놓고 보면 종이 한 장, 스티커 한 장일 수도 있지만, 그걸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무드가 더해지니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브랜드가 있다. 바로 흑심(Black Heart). 연필이라는 한 가지 아이템에 집중한 브랜드였는데, 부스를 보는 순간 느껴졌다. 이건 단순히 연필을 파는 게 아니라, 연필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 연필 하나하나의 역사, 단종된 모델, 오래된 브랜드의 흔적까지 세심하게 전시되어 있어 마치 작은 연필 박물관 같았다. “연필을 이렇게까지 깊이 좋아할 수도 있구나” 싶은 인상. 하나의 물건을 오래 좋아하고 파고들다 보면 결국 이렇게까지 도달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 외에도 손글씨로 만든 메모지를 직접 소개하는 부스, 종이의 질감이나 제본 방식에 대해 설명해주는 브랜드, 독특한 재료와 색감으로 실험하는 브랜드까지… 부스마다 저마다의 속도로, 방식으로 문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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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문구에 기대는 이유는 단순히 ‘기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나만의 방식을 찾고 싶어서, 그리고 때로는 감정의 틈을 조용히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해서—문구를 고르고, 쓰고, 모으게 된다.

 

나 역시 다양한 문구샵을 다니다 보면 내가 어떤 색감, 어떤 디자인, 어떤 질감을 좋아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스스로를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문구라는 점이 재미있다.

 

예전에 한 번 MD 기획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작은 문구 하나를 만들어내기까지, 어떤 컨셉으로 풀지, 재질은 어떤 게 좋을지, 포장 디자인은 어떻게 할지… 수많은 아이디어와 고민이 오갔다. 모든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 인벤타리오에서 본 문구들에 더 애정이 갔다.

단지 예쁜 상품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어떤 고민 끝에 지금의 형태로 나왔을지를 자연스레 상상하게 되는 문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번에도 몇 장의 스티커와 메모지를 새로 들였고, 한동안 쓸 일이 없어도 일단 갖고 싶은 마스킹 테이프도 몇 롤 골랐다. 당장 쓰지 않아도 괜찮다. 언젠가 꺼내서 쓸 순간을 기다리는 것도 이 문구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니까.


돌아오는 길, 가방 안에서 문구들이 한껏 담아진 증정백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오늘의 이 느낌을 기록해두고 싶다고.


아마도 조만간 다이어리 한 쪽에 이번 전시의 기억을 조용히 남기게 될 것 같다.

 

<인벤타리오 문구 페어>는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떠올려보게 만드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내 일상을 조금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인벤타리오>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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