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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여기 하나의 질문이 있다. 당신은 누군가의 잘못을 대신 책임져야 하는가. 대답은 당연하다. 그럴 필요 없다는 것. 누군가의 잘못은 누군가의 잘못일 뿐이라는 것. 그러나 질문을 조금 바꾼다면 대답은 달라질 테다. 당신은 가족의 잘못을 대신 책임져야 하는가. 적어도 법적으로 연좌제가 사라진 사회에서라면 대답은 정확히 같아야 한다. 그러나 가족과 사회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유기체라서, 이토록 단순한 질문을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끌어안고 만다. 가족 중 누군가의 잘못은 누군가의 잘못이지만, 동시에 나의 몫이 될 수도 있다고.


연극 <견고딕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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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한 여자가 비트에 맞춰 소리친다. “내 면상에 신경 꺼! 내 인상 내 인성 내 인생에 신경 끄라고!” 그녀의 포효는 사납고, 그 리듬은 흥겨우며, 그 내용은 엄숙하다. 세상에게 자신과의 완전한 단절을 요구하는 그녀의 선언은 허무맹랑하지만, “견고딕체”로 단호함을 표출하는 순간 그것은 실천적 다짐이 된다. 그것은 물론 그녀가 귀에 에어팟을 낀 채 소리를 차단한 진공 상태에서 속으로만 할 수 있는 외침이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비명이다.


옷도, 화장도 까맣게 색칠한 것만 같은 수민(서지우)은, 자신의 온몸을 덮은 색깔처럼 세상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 한다. 그녀의 강렬한 인상은 그녀의 세상을 향한 필사적 방어기제다. 세상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한 위장색인 것. 2년 전, 그녀의 쌍둥이 동생 수빈이 죽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서. 그 충격적인 사건으로 수민과 그녀의 가족이 딛고 있던 견고하고 안정적인 삶의 지반이 무너진다. 그들의 삶 아래 갑작스레 뚫린 구멍들, 현재가 빨려 들어가는 싱크홀과, 미래마저 집어삼키는 블랙홀과, 빠지면 나올 수 없는 맨홀 속에서 살인자의 가족은 허우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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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우리 삶에서 이해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일들이 생겨난다. 나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의 책임이 아닌 것도 아닌, 가족이 벌인 사건들이 그렇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억울할 만큼 복잡하고 질기므로, 그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응답의 의무를 지게 된다. 수빈의 죽음으로 가족에 균열이 갔으니 하나의 가족으로서 단일한 대답에 이를 수는 없을 것이고, 이제 수민의 남은 가족 구성원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엄마 진희(김채원)의 응답은 부정이다. 사건이 닥쳐오자 그녀는 잠재적 위협이 될 단서들을 모두 없애고, 수빈이 저지른 행동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책 속에 파묻힌다. 벌어진 현실을 수습하지 않은 채 과거로 돌아가고만 있는 것. 반면 아빠 우철(박세정)의 응답은 체념이다. 꼬인 실타래는 풀기 위해 잡아당길수록 더 복잡하게 꼬일 거라는 것. 어쨌든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이 났으므로, 현재의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가족의 일 앞에서 엄마는 부정했고 아빠는 체념했다. 이제 죽은 수빈의 쌍둥이 자매인 수민의 응답이 남는다.


같은 날 같은 시간 태어나서 자랐기에 수빈과 가장 많은 시간을, 말하자면 인생의 전부를 함께 나눈 사이였으므로, 수민의 응답은 끝내 흔적을 남기지 않은 수빈의 마지막 마음과 더 밀접할 테다. 그렇기에 마치 수민에게 수빈이 무책임하게 남기고 간 삶의 반쪽을 살아내야 할 책임이 부여된 것처럼 사회의 시선은 매섭다. 수민은 차라리 자신과 너무 닮은 수빈의 얼굴을, 혹은 그 삶을 지우고자 한다. 다만 그 전에 죽은 수빈을 대신해서(혹은 가족의 의무를 대신해서), 혹은 살아있는 또 한 명의 수빈으로서, 피해자의 가족에게 사과하기로 결심한다. 이 결심은 그녀가 수빈의 그늘―죄책감을 벗어나 독립된 수민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결심이다. 그녀의 여정을 돕는 이들이 죽은 피해자의 각막을 이식 받은 미나(문가에)와 심장을 이식 받은 현지(임예슬)다. 피해자의 신체 기증을 통해 다시 살게 된 그녀들은 감사의 마음과, 피해자의 삶을 나눠 쓰고 있다는 책임을 함께 짊어지고 사는 이들이다. 사과를 전하려는 사람과 감사를 전하려는 사람. 그 상반된 의도가 따뜻한 방식으로 융합되면서 수민의 여행은 이제 단순한 사과의 여정에서 책임의 여정으로 깊어진다.


그러니까 연극 <견고딕걸>은 견고딕의 아주 거대하고 단단한 책임에 대한 이야기다. 가족은 어떤 고통이 생겨났을 때 가장 빠르게 번져서 커지는 집단이다. 가족에게 뭉뚱그려 부여된 책임은 가족에 속한 무고한 개인을 억울하며, 비극적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족의 울타리에 있는 한, 가족의 화목만을 선택적으로 누릴 수는 없을 테다. 부정과 체념 이전에 최소한의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가족의 끈으로 묶인 모두가 깊고 어두운 구멍을 함께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던져지는 지탄의 시선은 사회적으로 천천히 바로잡아야만 할 문제다. 연극 <견고딕걸>은 이 부분까지 깊게 나아가진 않는다.) 견고딕의 걸(girl),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가 맞닥뜨린 세상은 버겁다. 그 버거움을 준 것이 가족이라면, 함께 이겨내는 것 역시 서로를 아끼고 지켜줄 가족의 이름 아래서다. ‘네가 망친 시간은 내 시간’이기도 하지만, 내게 그 시간을 허락한 것 역시 가족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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