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도르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벤야민, 2. 대학원 졸업을 위해 아도르노를 한때 파헤쳤던 나날 그리고 3. 아도르노를 이해하기 위해 벤야민 수업을 들으러 모 대학 미학과 수업을 청강하러 다녔던 기억.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나는 자신 있게 이 책을 펼쳐 들었으나, 책의 끝부분까지 다다랐을 때까지도 단 하나의 작품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책을 하염없이 읽고 또 읽던 중, 이 책에 대한 단상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가 보이는 서평 하나가 내 시야에 마침내 들어오게 되었다. 그 서평은 바로 이 책의 26번 글인 「서평: 범죄소설은 여행 중」이었다. 오랜만에 한 철학책의 한 페이지를 읽고 책이 해지도록 또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하고는 학위 논문의 한 문장을 쓸 수 있었던 1년 전처럼, 이번에도 이 서평글 하나를 읽고 또 읽었다.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면 부분에 초점을 두고 글과 동화되어 텍스트에 진입해보는 것도 작품을 대하는 또 하나의 겸손한 태도일 것이라 믿으며, 어렵디어려운 벤야민의 생각에 조금 다가가는 시도를 이 글을 통해 감행해보고자 한다.
벤야민의 「서평: 범죄소설은 여행 중」은 '기차여행'과 '독서' 간에 나타나는 특유한 상호작용에 다루는 짧은 분량의 글이다. 나는 대학생 때, 프랑스의 릴(Lille)이라는 도시에 한 학기를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대부분의 교환학기를 가고자 하는 학생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교환학생의 목적과 테마는 '여행'이었다. 그랬던 탓에 학기 중에도 여행을 꽤 다녔지만, 학기가 끝나고 나서는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배낭여행을 다녔다.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그중 가장 긴 이동시간은 20시간 정도로 길기도 했다. 그 긴 시간을 음악을 들으면서 보내기도 했으나 여행을 마치고 복학할 학기에서 나는 학사 졸업논문을 작성해야 했기에, 전공과 관련된 학술적인 도서를 읽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학사 졸업논문이 학술지에 공식적으로 기고되는 건 아니지만, 당시의 나는 나의 서투른 생각 덩어리들을 표현해줄 수 있는 철학자를 찾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나는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서양 철학사』 번역본의 E-BOOK 버전을 방방곡곡 기차 혹은 버스를 타는 동안의 애착 도서로 삼고 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통해 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었다. 러셀이 설명하는 '서양철학사'는 분석철학자의 시선 아래 다소 편향적인 방식으로 -특히나 중세의 사상에 대해서- 서술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0쪽 가량의 두꺼운 책이었음에도 수많은 기차와 버스를 타면서 도착지까지의 한정된 시간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읽어갔다.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은 앞뒤 문맥을 보면서 계속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과 근접한 이야기를 한 철학자는 없었다는 걸 다 읽고나서야 깨달았지만, 그래도 긴 흐름의 책을 내가 나의 고유한 시선을 가지고서 주체적으로 읽어가고 있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평의 초반부에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겨진 이들의 "너무 늦었다"라는 명언(모든 지체됨의 원형)부터 칸막이 객실에 있을 때 엄습해오는 고독, 연결 편을 놓칠 지도 모른다는 불안, 진입 중인 모르는 역에 대한 공포에 이르기까지, 예측할 수 없는 시공간의 문턱들을 거듭 넘게 되리라는 것까지도 [승객들은] 알고 있다. 승객은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신과 거인의 전쟁에 말려 들어버렸음을 느끼면서 철도의 신들과 정차의 신들이 벌이는 전쟁의 말 잃은 증인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같은 것은 같은 것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 승객에게는 구원이다. 갓 제단된 종잇장들 사이에서 승객은 태곳적의 여행 공포증을 극복하게 해줄 불필요한 공포증을(참신한 공포증이라고 할까) 얻고자 한다.
(p162-163)
벤야민의 말마따나, 유럽 배낭여행에서 기차나 저렴한 버스를 탔을 때, 그것들은 수많은 역에 수도 없이 정차하곤 했다. 내 생각과 유사하기까진 아니더라도 밀접한 사상을 책 속에서 찾겠다는 일념으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때면, 나도 모르게 벌써 많은 역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지금 있는 곳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기차에 탑승했다는 사실이 주는, 책 속으로 펼쳐지는 고도의 몰입감은 과연 어떻게 가능해지는 걸까? 그것은 아마 일상으로부터의 '분리됨'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리됨은 이 서평이 담긴 책의 이름인 '고독'과도 관련되어 있다. 내가 탑승하고 있는 이 기차가 과연 내가 가야 할 목적지에 잘 가고 있는 걸까? 기차 앱에 나오지도 않는 역에 정차할 때, 기차가 정차한 지 한참이 지났을 때도 출발하지 않고 갑자기 총을 든 경찰이 기차에 탑승한 것을 목도할 때면, 타국에서의 불안감은 한층 고조된다.
더군다나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이 부분을 읽고 있을 때는 프랑스 영토에 있었는데, 다음 부분을 보고 있을 때면 어느새 독일 영토에 다다른 이 상황이 마치 벤야민의 표현처럼 '예측할 수도 없이 시공간의 문턱을 가만히 앉아 있는 채로 넘나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때 또 벤야민의 말처럼, 같은 것을 같은 것으로 잠재우고자 하는 참신한 공포증이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 중인 승객에게 일어나게 된다. 즉, 시공간의 문턱을 넘어가는 상황에서 생겨나는 불안을 책이 구현하는 하나의 제단된 세계로의 몰입이라는 일련의 '승화작용'이 기차에 탑승 중인 그 당시의 나에게도 일어난 것 같았던 것이다.
나아가 서평의 후반부에서, 벤야민은 또 다음과 같이 이 상황을 묘사한다.
독자가 독서에 그렇게 몰입하는 때가 여행할 때 말고 또 있을까? 독자 스스로 자기 삶이 책 속 주인공의 삶에 섞여 들어가 있음을 그렇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때가 여행할 때 말고 또 있을까? 책 읽는 사람의 몸은 주인공의 운명이 적힌 책이라는 씨실을 바퀴의 리듬에 따라 날실 사이로 드나들게 하는 베틀이 아닐까? (...) 여행 중 독서와 기차 탑승의 관계는 기다림과 기차역의 관계 못지않게 밀접하다.
(p.165)
내가 어딘가로 이동해가는 그래서 일종의 '초월'이 계속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특정한 하나의 책이 각각 선사하는 세계는 벤야민의 표현처럼, 서로 씨실과 날실의 관계로 서로 엮여가며 고유의 무늬를 만들어낸다. 내가 만약 러셀의 책을 기차 여행 중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 읽었더라면, 기차 여행 중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의 결과 같이 무늬가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배낭을 매고(현실은 캐리어를 들고) 수많은 기차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책 한 권을 그때처럼 몰입하여 읽을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기를 고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벤야민의 미로 같은 글들 속에서 본인의 경험과 겹치는 것을 하나 택하여 그것에 푹 집중적으로 몰입해보기를 감히 추천해 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