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벽을 어떻게 넘어. 저걸 넘다 죽은 사람들이 한둘이야?”
뮤지컬 <헤드윅> 주인공 한셀은 동독, 즉 공산주의 국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엄마에게 인간은 원래 두 인격체가 한 몸이 돼 완전한 존재로 살았었단 이야기를 듣는다. 완전함을 두려워한 신들이 모든 인간을 불완전한 반쪽으로 갈라놨단 것이다. 한셀은 그날부터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갈망한다.
공산주의 동독에서 살던 한셀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경계에 선 불완전한 존재였다. 독일을 둘로 가르던 베를린 장벽 너머 서독 맥도날드 간판을 보는 한셀은 자유를 더 동경한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을 넘다 죽은 사람들처럼 되긴 무섭다. 장벽 안쪽, 즉 동독에선 반쪽을 못 찾았으니 장벽을 넘어야 반쪽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유와 반쪽을 향한 갈망으로 폭발할 것 같던 때, 벽을 넘을 기회가 생긴다. 금기를 깰 방법을 마침내 찾은 것이다. I'm lovin' it.
금기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금기는 지켜야 하고, 건드릴 수도 없고, 감히 깨려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소수의 지배층은 늘 이런 공포심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특권을 지키는 장벽을 높이 쌓아올렸다. 나름대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대부분의 피지배층 또한 법과 질서를 따르며 장벽 근처는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수의 반골(反骨 : 권력, 권위에 순응하거나 따르지 않고 저항하는 기골을 가진 사람)들은 금기를 왜 지켜야 하는지 의심했다. 장벽이 높아질수록 이런 별종들은 벽 너머, 혹은 벽 틈으로 보이는 다른 세상을 동경하며 벽이 무너지길 꿈꿨다.
좁게는 자신의 인생과 신념, 넓게는 국가와 체제, 신에게까지 저항한 이들을 뮤지컬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헤드윅>의 헤드윅(한셀), <레미제라블>의 ‘불쌍한 사람들’, <하데스타운>의 오르페우스가 그렇다. 장벽을 넘으려다 상처투성이가 되거나 심지어 죽을지라도, 이들의 행동은 유의미한 것을 넘어 관객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줬다.
장벽 따윈 부숴버려 - <헤드윅>
자유를 갈망하던 한셀은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 근처에서 미군 루터를 만난다. 그와 결혼하면 미국 국적을 얻고 장벽을 넘을 수 있다. 어릴 때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폐쇄적인 동독으로부터, 사랑하지만 냉정함을 견딜 수 없는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루터와 결혼하고 국경을 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성전환 수술을 하고, 엄마의 이름을 받아 ‘헤드윅’이 된 한셀. 1년 후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다른 남자와 바람난 루터는 떠난다. 그와 결혼하지 않아도, 성전환 수술을 안 했어도 베를린 장벽을 스스로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헤드윅도 베를린 장벽처럼 무너지지만, 영영 쓰러져 있진 않는다. 첫사랑인 음악에 몰두하던 그는 미군 아들 토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잃어버린 반쪽이 토미일 거라 확신한 헤드윅은 그를 가수로 성장시킨다. 하지만 헤드윅의 성전환 수술 흔적을 받아들이지 못한 토미는 그를 배신한다. 상처받고 노래도 빼앗긴 헤드윅, 토미 투어 콘서트 근처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며 증오와 분노를 퍼붓는다. 자기혐오에 잠식되던 순간,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토미의 목소리가 들린다. ‘용서해요, 난 몰랐어. 난 너보다 어린 아이였잖아.’
‘이젠 당신 존재의 이유를 받아들여 보란’ 토미의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잃어버린 반쪽이 아니란 걸 깨달은 헤드윅. 반쪽 찾기, 토미에 대한 애증, 전남편 루터처럼 국적을 무기로 이츠학과 밴드 멤버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내려놓은 헤드윅은 공연장을 떠난다.
그의 장벽은 ‘나를 나보다 사랑해줄 반쪽을 찾는 일’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해줄 수 없고, 불완전한 반쪽인 나 자신만이 내 또 다른 반쪽이란 걸 깨닫는 순간 헤드윅의 장벽은 무너진다.
저 너머 장벽 지나 오래 누릴 세상 - <레미제라블>
장벽을 넘으려다 상처투성이가 되거나 목숨까지 잃은 19세기 프랑스 불쌍한 사람들. <레미제라블>은 그들 각자의 목소리와 신념이 선명하게 드러난 명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 보리’란 가사처럼, 그들은 저마다 누군가, 무언가를 사랑하느라 인생을 바쳤다.
조카들에게 줄 빵을 훔쳐 복역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장발장은 주교의 인류애에 다시 태어난다. 세상을 사랑하고 딸 코제트를 사랑하는 일에 삶을 바친 그는, 평생 자신을 추적한 경찰 자베르조차 용서하며 목숨을 구해주는 인류애를 베푼다. 젊은 시절 미리엘 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악은 결코 교화되지 않는단 신념을 가진 경찰 자베르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그가 죄인 장발장을 쫓는 건 혐오스러운 부모와 자신의 뿌리를 견디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너 같은 놈은 안 변한단 확신에 차 있던 그는, 장발장에게 목숨을 구원받자 무너진다. 평생 스스로를 지탱한 가치관이자 장벽,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니 단죄해야 한다’는 신념에 배신당한 자베르. 누구도 곁에 안 두고 신념이란 장벽에만 기대 살던 그는 벽과 함께 무너져 심연에 잠식된다.
코제트의 어머니인 판틴은 여공이었다. 일을 잃고 거리에 내몰린 판틴은 목걸이와 머리카락을 팔다, 순식간에 몸까지 팔며 절망으로 추락한다. 코제트를 사랑하는 것에 인생을 바쳤지만, 당시 미비했던 사회 제도란 장벽에 가로막혀 건강까지 잃고 세상을 떠난다. 장발장이 코제트의 아버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코제트조차 불행이란 장벽에 갇혔을지도 모른다.
성장한 코제트가 사랑하게 된 마리우스는 왕당파 부르조아의 외손자이지만 반골 기질을 가졌다. 그는 리더 앙졸라를 비롯한 아베쎄의 벗들(낮은 자들의 친구)과 함께 왕정 반대 시위를 하며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린다. 공화주의자들의 대부인 라마르크가 사망하자 혁명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어리지만 당당한 혁명군 가브로쉬, 신분 차이란 장벽에 막혔지만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며 그를 지켜주던 에포닌도 바리케이드에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그들의 죽음에 각성한 생존자들은 ‘저 너머 장벽 지나 오래 누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사회 제도, 삶을 버티게 한 신념, 국가와 체제란 장벽을 넘다 세상을 떠난 불쌍한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다. 옳다고 여기는 것을 믿고, 사랑하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행위는 숭고하다. 살아남은 미래 세대, 마리우스와 코제트 또한 수많은 장벽들에 좌절하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장발장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놓아준 사다리에 올라, 장벽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 정도는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노래가 아름다워 울며 보내줬어, 장벽도 - <하데스타운>
더없이 연약한 존재가 오히려 가장 강할 때가 있다. 반대로 무한한 권력을 가진 존재가 나약해지는 순간도 분명히 존재한다. 전자는 <하데스타운>의 오르페우스, 후자는 하데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왕국에 쌓아올린 장벽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가난, 불공정한 노동, 기후 위기 등)에 비유해 전개한 작품이 <하데스타운>이다. 뮤즈의 아들 오르페우스는 가난과 추위에 지쳐 떠난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하데스타운으로 향한다. 하데스타운은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가 쌓아올린 장벽 안에 자리한 광산이다.
하데스는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장벽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하데스타운을 개발하는 건 아내 페르세포네를 위한 일이라고도 말한다. 술과 춤, 음악을 사랑하는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는 일 년의 반은 지상에 살며 생명들을 살게 한다. 의심에서 비롯된 집착이란 방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하데스는 약속보다 빨리 페르세포네를 지하로 데려간다. 그래서 지상의 겨울은 점점 길어진다. 하데스는 아내에게도 의심이란 장벽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하데스는 젊은 시절 페르세포네와 사랑할 때 불렀던 노래를 오르페우스에게 듣곤 눈물을 흘린다.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공포를 이겨내며 하데스타운으로 내려온 오르페우스. ‘장벽마저 울며 보내줄’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지하 세계의 권력자이자 장벽 그 자체인 하데스의 마음에 균열을 만든다. 오르페우스의 힘으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은 무너진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려가라고 허락하지만, 자신도 빠졌던 의심의 딜레마에 그를 몰아넣는다. 지상에 다다르기 전에 에우리디케를 한 번이라도 돌아보면 그녀는 영원히 지하 세계를 나가지 못한다는 것.
에우리디케와 함께 있음에도 의심이란 장벽에 갇혀 자신도, 그녀도 믿지 못한 오르페우스. 결국 에우리디케와 또다시 이별하게 된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지만, 오르페우스가 이번엔 에우리디케를 되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지상과 지하를 가르는 선을 넘고, 하데스타운의 장벽을 넘는 오르페우스의 사랑과 용기는 더없이 아름답고 강력하다.
금기를 지키고, 선은 넘지 않으며, 장벽은 쳐다보지도 않는 게 안전하게 사는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뮤지컬 <헤드윅>, <레미제라블>, <하데스타운>의 주인공들은 모든 걸 걸고 장벽을 향해 덤벼들었다. 실제 우리 삶에서도 ‘주인공’ 롤을 차지하려면 그 정도 결단력과 패기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금기는 깨질 수 있고, 선도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 또한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