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한번은 들어봤던 유비, 관우, 장비와 조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뮤지컬 [적벽]은 우리나라 판소리[적벽가]를 무대화하여 구상한 창작극이다. 물론, 중국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의 판소리 [적벽가]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삼국지]가 영웅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다루는 데 반해서 한국의 판소리는 수용자가 서민이기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의 이야기가 중심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뮤지컬에서도 잘 드러난다.
[적벽]이 다른 뮤지컬에 비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주요한 인물들, 유비, 관우, 장비, 공명, 자룡, 조조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에게 집중하는 것은 이 공연을 관람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이 뮤지컬은 모든 배우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압도적인 장면과 마음을 울리는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비워진 공간과 색깔
공연에서 모든 배우가 돋보이게 된 것에는 ‘무대’가 정말 큰 역할을 했다. [적벽]의 무대는 정말 단순하면서 깔끔하다. 흰 바탕에 넓은 공간을 둔 무대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고, 무대 중앙엔 악기가 있다. 이런 무대는 여러 배우들의 동작을 한 눈에 담기에 적절하다. 무대에 특별한 구조물을 배치하거나, 현실적인 배경을 묘사한다면 특정 인물이 활동하는 장소가 되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배우들의 몸동작보다는 구조물과 어우러지는 배우의 모습에 시선이 갈 것이다. 하지만 [적벽]은 몇 안 되는 구조물을 양옆에 배치하고 무대 가운데 공간을 넓게 확보함으로써 배우들의 움직임이 잘 보이게 했다. 무대 자체가 누구 하나를 주목시키는 구조가 아니라 배우들의 근무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제작된 느낌이었다. 그 텅 빈 무대가 사람들의 동작으로 꽉 채워질 때, 아주 큰 에너지가 느껴졌다.
또한, 무대가 흰 바탕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색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얀색은 어느 색깔보다 색이 쉽게 묻는다. 그래서 배우들의 동작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조명도 명확하게 보인다. 배우들의 동작과 조명이 중요한 이유는 판소리의 단점과 연결된다. 판소리의 최대 단점은 아마 전달력에 있을 것이다.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고, 합창하는 부분이 많다 보니 가사나 대사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물론 무대 양옆의 모니터가 실시간으로 대사를 띄우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은 배우들의 동작과 조명을 통해 상황을 설명하기로 택한 것 같다. 배우들의 몸짓과 부채를 통해 상황을 묘사하고, 각 장면과 어울리는 색깔, 그리고 그 장면을 설명하는 글씨를 조명으로 비추면서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흰 바탕에 ‘도원결의’, ‘삼고초려 ’와 같은 글씨를 조명으로 만들거나, 인물이나 나라를 지칭하는 ‘위’, ‘유비’, ‘조조’와 같은 글씨를 관객에게 조명으로 보여준다. 단점을 보완하는 섬세한 조명은 흰 바탕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가 아닌 소리꾼이 된 사람들
앞서 설명한 대로 유비, 관우, 장비, 조조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이 돋보이지 않은 것에는 무대의 역할도 있고, 대사 자체의 역할도 있다. 공연을 구성하는 대사가 주인공들에게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조조는 꽤 많은 대사를 소화하긴 하지만 대체로 이야기의 진행은 모든 배우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합창이 공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판소리의 특징과도 연결된다. 판소리의 본래 구조는 소리꾼 한 명이 장단에 맞춰 이야기 속 인물과 서술자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 공연도 마찬가지로, 각 배우들에게 캐릭터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돌아가면서 코러스를 맡고, 서술자를 맡는다. 한 인물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가도 금세 그들은 코러스로 변신하여 전체 무대의 일부분을 맡는다. 이러한 구조 자체가 주인공을 지우고 전체를 빛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음악까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판소리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장단을 맞추는 고수와의 호흡이다. 뮤지컬[적벽]에서도 음악과의 호흡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단 무대 중앙에 악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만으로 이 공연이 음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드러난다. 또한, 공연 중간중간 악사들 중 한명이 무대로 나와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도 한다. 이러한 연주자들과의 협동은 판소리의 장점을 살리는 동시에, 이 공연이 빛나게 하고 싶은 범위가 ‘모든 배우’에서 ‘모든 배우와 악사’까지 확장되는 것을 보여준다.
부채도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공연 내내 배우들이 손에 붙잡고 있는 부채는 시각적 효과와 청각적 효과를 동시에 보여준다. 부채가 펼쳐질 때 들리는 소리는 하나의 리듬이 되어 돌아온다. 모든 부채가 동시에 펼쳐질 때 관객은 통일된 소리가 만드는 리듬과 부채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장면을 함께 목격한다.
이렇게 [적벽]은 무대와 대사의 구조를 통해 모든 배우들이 빛날 수 있다. 또한, [적벽]이 담아내는 온전한 ‘하나’의 범위가 배우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적벽]이 웬 말인가’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한국의 판소리이기는 하나 중국 이야기가 배경이기에 찾아오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공연의 특성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개인’이 아닌 ‘전체’가 빛나는 공연이 이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개인주의의 시대에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지 않고 모두를 돋보이게 하는 공연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적벽]이 낡고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관객들에게 생동감 있게 다가올 수 있다. [적벽]이 만들어내는 일심협력(一心協力), 즉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하나의 장면을 만들고, 하나의 감정을 쏟아내는 에너지는 정말 강력하다. 아마 어떠한 공연의 장면보다 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적벽]이 ‘모든 사람’을 조명하는 공연이 된 배경에 판소리의 특징이 있다는 것은 이 공연을 더욱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그동안 서구화된 공연에 익숙해져 있다면 영웅의 꿈이 아닌 민중의 꿈을 이뤄주는 한국적인 공연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가 가장 익숙해야하는 것들이 어느새 어색해져버린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