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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10년에 한번 공주처럼 여행 갈래, 아니면 매년마다 거지같이 여행 갈래?”

 

아마 7살쯤이었던 것 같다. 아빠의 질문에 단지 ‘매년’이라는 단어 하나로 호기롭게 후자를 택했다. 그 이후 나의 가족여행은 직항 대신 경유를 이용했고, 5성급 호텔 같은 숙소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았으며, 지하철 노선표를 외울만큼 대중교통을 탔고, 늘 휴대용 밥솥과 함께했다. 이러한 이유로, 호주에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스테이크가 아니라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라는 기이한 결론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나의 가족여행은 뽀얀 필터를 씌운 채, 아름다운 것만 향유하다 오는 여행이 아니라 기본 카메라로 그곳을 직면하다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통해 그곳을 바라본 사람일 뿐 카메라를 들고 촬영 버튼을 누른 사람은 아니었다. 전화도 안되는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부모님 뒤에 숨어 눈물을 뚝뚝 흘렸고, 철 없는 남매가 무릎에 누워 공항 벤치에서 쿨쿨 자는 동안 엄마 아빠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렇게 남매는 참 많이도 봤다. 엄마 아빠가 들어준 카메라로 세상 이곳저곳을 바라보았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가까이 다가가며 여행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이번 7인7색 중동으로 간대!!”

 

이 글의 주인공인 여행은 배경설명이 좀 필요하다. 내가 다녔던 대안학교인 소명 학교엔 7명의 친구들끼리 배낭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이 있고 그것을 7인 7색이라고 부른다. 선생님과 함께 가기는 하지만 선생님은 동행만 해주실 뿐 모든 것을 학생이 책임지고 이끄는 여행이다. 각자 담당 지역을 나눠서 조사하고, 여행 일정도 직접 계획한다. 여행 중에도 그 지역은 그 지역 담당자가 가이드로서 팀을 이끈다. 한마디로 학생들 모두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직접 촬영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여행 멤버는 순식간에 채워졌고,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기 전, 20살의 첫 여행을 친구들과 중동으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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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 또한, 뽀얀 필터 따위는 허락되지도 않았고, 찍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나의 기본 카메라는 언제나 촬영중이었다. 건너뛰기, 두 배속 같은 기능은 없다.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맨 앞에서 직면해야 했다. 온전히 내 두 손으로 카메라를 받쳐들며 다가갔고, 기어이 별과 지구의 조각 하나씩, 주저 앉은 곳에서 발견한 소화제와 허기를 달랠 레시피, 작열하는 태양이 담긴 노래를 받았다. 여행은 충분히, 넉넉히 나에게 관대했지만, 분명 다가온 것과 받은 것은 다르다. 난 지저분한 두 손으로 여행이 준 선물을 받았고, 그 무게를 오래 가늠해 보았다. 잴 때 마다 무거워지는 그 무게가 신기하기에 아직까지 들여다보는 중이다.

 

7명. 어마어마한(?) 인원수를 자랑하는 우리의 여행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항상 도시에 도착한 그날 숙소를 잡는다. 숙소를 예약해도, 숙소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동은 분명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곳이 절대 아니다. 카이로에 처음 도착했을 때 숙소 사장님 마음대로 우리의 방을 빼는 신박한(?) 상황이 발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즉석에서 숙박비를 흥정해야 가장 싸게 머물 수 있으니까 이러한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린 도시에 도착하면 모두 배낭을 벗고 일을 시작한다. 배낭을 지키는 사람, 그 도시에서 쓸 돈을 인출하는 사람, 숙소를 조사하는 사람으로 흩어진다. 다시 모였을 땐 가장 적합한 숙소가 어디인지 회의하고, 결정되면 출발한다. 우린 항상 이런 여행이었다. 무언가 처리해야 할 것이 생기면, 담당을 나눠서 움직인다. 누군가는 식당을 찾고, 누군가는 인출을 하고, 누군가는 필요한 것을 사고, 누군가는 흥정한다. 이렇게 일이 잘 분담돼야 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순조롭지만은 않다.

 

난 여행에 와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좌절을 철저히 겪었다.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기 때문에 책임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최상의 결과를 내야한다는 강박에 휩싸였다. 당연히!!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난 예측 불가능한 상황 앞에 놓이면, 정지되는 사람이고, 여행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아주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휴.. 그럼에도 다른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마음의 짐만 늘어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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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다합에 있었을 때 다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 날이 있었다. 그날이 설날이기도 했고, 우연히 다합 버스에서 만난 한국 분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식당 장소를 친구 하나와  같이 찾으러 나갔다. 우리 숙소가 있는 다합 시내 쪽 식당은 비싼 편이었고, 만나기로 한 한국 분이 머물고 계신 숙소와 가까운 곳으로 식당을 정해야 했기에, 먼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한걸음, 한걸음 걸으면서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멀리 걸어갈수록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고, 다합 식당은 무자비했다. 말도 안되는 가격이거나, 식당이 너무 좁았다. 또 하나를 망치는구나.. 자책하는 마음은 뭉게뭉게 구름을 이루고 이내 비를 뿌렸다.

 

시간은 없고, 마땅한 장소도 없어서 우울에 빠지려던 무렵, 적절한 식당이 아닌 다른 것이 예비되어 있었다. 바로 쌤의 결심이다. 무슨 결심이냐면 비싼 거 먹자는 결심..! 쌤은 설날이고, 손님도 계시니 한 테이블당 1000파운드를 쓰자고 하셨다. 우리는 보통 7명이 한끼를 먹을 때 300~400파운드를 지출한다. 근데 한 테이블, 그니까 4명에 1000파운드라니. 완전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엄청나게 큰 돈인 것처럼 썼지만 1000파운드는 4만원 정도이고, 400파운드는 16500원이다. 우리는 보통 한 명당 2000원 정도의 식사를 했던 것인데 이날은 한 명당 10,000원어치의 식사를 했던, 기록적인 날이다) 이런 걸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더 크고 좋은 것이 왔다. 가격이 비싸 눈으로만 담아 놨던 크고 넓은 식당에서 우리는 배부르게 먹고 샐러드라는 사치도 부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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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번 넘기는구나. 숨을 몰아 쉬었다. 어느 날, 쌤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는 너무 각자의 감정에 충실하고, 개성에 충실하다고. 각자가 가진 다양성의 빛 이 반짝이는 풍경은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단체 생활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그러한 다양성이 다음 걸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마음에 오래 머무는 말이었다. 멈칫하고, 걱정하고, 자책하는 나의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음 걸음을 나갈 수 없다. 내가 나에게 중독되는 순간 내가 만든 집에 갇혀버리게 될 뿐이다. 집 안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균열에 온갖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 안에서 벗어나야 했다. 예상치 못한 도움과 응원에 힘입어 기어이 집에 조그만 창문을 내고 밖을 바라보니, 그대로였다. 나만 소용돌이 치고 있었을 뿐,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크고 넓은 세상을 앞에 두고 그동안 너무 작은 것에 연연해하고 있었다. 여행을 통해 오로지 ‘나’로 똘똘 뭉친 내 감정이 풀어지고 다듬어지며, 세상을 들여다 보는 창문도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할 문도 생겼다. 내 감정과 자책에 갇혀 있던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들의 다음 걸음을 위해 잠시 내가 만든 집에서 나가보려 한다. 집은 머물러서 집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어서 집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을 마쳤을 때 나의 집으로 돌아와 천천히 내게 온 장면들을 소화한 후, 또 다시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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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유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듬어지고 있었구나, 함께하는 마음을 키워가고 있구나. 버릴 표정도, 시간도 없다. 깨달아야 할 것을 알아가는 순간과 우울에 머무는 순간도 모두 밝기를 따질 필요도 없이 동등하게 빛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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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임예영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중동이라니! 다음 글도 기다리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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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8 13:14:2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