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연극 <워크맨>이 현대인의 정신건강, 인간과 기술, 기후와 미래를 다룬 독창적인 서사로, 기술 발전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무대 위에 펼쳐낸다.
2060년의 한국엔 우울증이 만연하다. 투신이 빈번하고 많은 이들이 ‘워크맨’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불과 35년 후의 미래일 뿐이다. 지금의 청춘들이 중장년이 될 만큼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짐작한 연극 <워크맨>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그 미래를 살아갈 현재의 사람으로서 느낀 바는 ‘결국은 현재’라는 것이었다.
<워크맨>은 전반적으로 우울증을 다룬다. 분노조절 장애나 성인 ADHD, 공황발작 등 개개인이 가진 병력도 모두 우울증과 결합하여 있다고 한다. 많은 정신질환이 사실 우울증과 결합하여 있다는 것을 모든 현대인이 알고 있을 수는 있을까.
누구보다 우울증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민준이 “우울증이 완치된 줄 알았다.”라고 내뱉는 순간에 무책임함을 느꼈다. 가족이기 전 의사로서의 민준이 섣부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민준은 이렇게 말했다.
“내기 일찍 죽을 걸 알면서도 계속 술을 마셔서 일찍 죽으면 그건 자살일까, 병사일까?”
민준에게도 우울증의 가지가 뻗어있던 것이었다.
이처럼 우울증은 본인이 본인일 수 없게 만든다. 유리의 불면증도, 하루의 분노도 마찬가지다. 우울증과 결합하여 자신을 잃게 만든다. 누구보다 우울증에 관해 잘 안다 해도, 이미 그것 때문에 누군가를 잃었어도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병이다.
‘워크맨’ 앱을 사용하며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그 누구도 호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의 병은 쉽게 완치되지 않는다. 이것이 <워크맨>이 보여주고자 한 우울증의 심각성임을 깨달았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워크맨>을 관람하면서도 결국에는 ‘현재’를 고민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워크맨>이 던지는 시선의 끝은 미래가 아닌 현재일지 모른다.
도윤이 설린에게 건넨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안 하려고 한다. 기피직이지 않냐’라는 말, 유튜브로 알려진 인플루언서를 지나치게 옭아매는 대중들의 시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던 알마에게 발생한 고장. 이 모든 것은 미래에서 던지는 현재의 문제점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회의 불편한 시선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이상 기피하는 직무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꿈과 이상, 신념보다는 연봉을 좇는 양상으로 지속될지도 모른다. 그 문제가 35년이 지난 2060년에도 여전할 것이라고 단호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알마라는 로봇만을 지운다면 현대라고 봐도 무방한 가정 내 문제도 그려내고 있다. 감정 소모가 큰 일을 수행하며 로그가 점차 쌓이고 그것이 오류를 불러일으켜 명령 수행에 차질이 생겼다. 더는 기쁘게 웃지 않으며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 가정 내의 문제를 로봇의 단순 고장으로 치환하여 보여주고 있다.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수리 끝에 반항하고 분노하던 알마는 사라지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며 웃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일종의 위화감을 느낀다. 감정을 소모하게 하는 일, 감정적 착취를 당하는 일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자문하게 된다.
이처럼 <워크맨>은 철저히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현재를 투영하고 있다.
다가올 미래 이전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지키고자 함을 이야기한다. 함께 긴 잠을 자려다가도 또다시 눈을 뜨고 살아가는 것. 어쩌면 <워크맨>은 우리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