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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여행을 함께하려면 동행과 협의가 이뤄져야 하는 몇 가지가 있다. 간단하게는 식습관부터 지출의 규모라던가 휴양이냐 관광이냐 하는 선택지들. 그중에서도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을 짜는 성향일 것이다. MBTI로 따지자면 J냐 P냐 하는 문제다. 여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도 숙소를 예약하지 않는 성향의 사람이 있고, 모든 타임 테이블을 엑셀로 정리하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어떤 여행은, 모든 계획을 무용하게 만든다. 그 우연성과 운명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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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사라지다


 

비행기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있었는데, 없어졌다. 항공편 지연이 너무 많이 된 나머지 도착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는 항공사의 설명이었다. 대체 항공편은 다음 날 저녁. 계획에도 없던 시드니 일정이 하루 생겨버렸다.

 

이때의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애매하게 지연되느니 화끈하게 취소돼서 오히러 좋다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빡빡한 여행 일정이 하루 줄어버려 막막했다고 해야 할까. 예정된 도착지에서의 렌트카와 숙소를 조율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했지만 뭐, 예상치 못한 깜짝 여행이 추가된 셈이 아닌가. 심지어 일정이 아무것도 없으니, 지금부터는 무엇이든 해도 좋다. 그렇지만 뭘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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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필자는 시드니의 우연한 하루에서 그 상대를 만났다. 그것도 네 명이나. 결항 비행기에서, 숙소이서, 그리고 대체 비행기에서 자꾸만 마주쳤던 이들은 시드니로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 두 쌍이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이번에도 결항하면 맛있는 저녁이나 같이하자던 약속은 대체 편 비행기가 출발하면 불발되었지만.

 

그 운명적인 만남 속, 마침 오늘 달링하버에서 불꽃놀이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 갑자기 생겨버린 빈 시간에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결항이 되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불꽃놀이 소식을, 결항이 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에게 전해 듣다니! 우연이 안내해 준 달링하버의 불꽃놀이는 건너편 빌딩에 비쳐 특히나 오래도록 반짝였다.

 

 

 

오지 않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당연하게도 이제 더는 변화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귀갓길은 생각지 못하게 길어졌다.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5분에서 6분 사이를 계속해서 맴돌며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계단에 앉아 있기를 한 시간째, 와인의 취기는 이미 모두 달아났다. 뒤에서 같은 지하철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현지인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Believe me. This will definitely get cancelled."

 

 

여행객인 필자야 영문을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지만, 취소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평온하게 계단에 앉아 한 시간을 태워버리는 그 여유가 충격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플랫폼에 있는 모두가 다 함께 같은 지하철을 기다리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두 명의 여성에게 플러팅을 하고 있은 남성도, 파티를 즐기고 나온 듯 텐션이 올라가 있는 젊은이들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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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지하철이 원래도 지연이 잦다지만 그날의 지하철은 한술 더 떠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말에 옳았던 셈이다. 철도 파업으로 몇몇 호선들이 취소되었고, Mascot 역에 정차해야 하는 공항철도는 처음 듣는 역에서 그 운행을 끝낸다고 했다. 어안이벙벙한 채로 한 시간을 기다린 지하철에서 내렸다.

 

한국의 고속터미널과 비슷한 Central 역은 온갖 호선으로 갈아타려는 승객들로 붐빈다. 모두 익숙한 듯 곳곳에 기대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중 몇은 다른 방법을 찾으려 역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그 기나긴 열차 지연과 마침내 취소에 이르기까지 화를 내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불만을 제기하는 승객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은 집에 갈 방법을 다시 찾아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였지 파업 자체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다.

 

결국 지하철을 포기하고 내려간 출구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가야했던 역으로 가는 택시를 함께 잡아타려는 모임이었다. 현지인과 여행객이 섞여있는 그 기묘한 택시 모임에서 일찍이 벌어진 상황은 별로 당황스럽지도 않은 일 같았다. 사라진 지하철은 사라진 것이고, 지금 해야하는 일은 집에 가는 것이다.

 

 

 

여행에서 우연을 즐거이 받아들이듯이


 

시드니의 사람들에게는 이 계획의 무용함이라는 것이 굉장히 흔한 일인 것이었나. 지하철에서 보았던 체념과 한의 정서는 공항에서도 유효했다. 새로운 비행편이 30분 정도 지연되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대략 비행기 정비를 해야해서 지연된다는 내용이었다. 함께 방송을 듣던 호주인, S에게 결항 되지는 않은거냐고 물었다.

 

 

"It hasn't been cancelled. Yet, of course."

 

 

“아직은” 안됐겠지. 비극적 정서를 해학으로 승화하기. 이쯤되면 예술이라고 불러야겠다. 온화한 날씨와 파란 하늘이 만들어낸 현상일까. 생각해보면, 비행기가 결항되었을 때 필자도 그리 화가 나지는 않았다. 여행을 온 것이니 좋게 생각하자는 마음도 있었거니와 여행 중 찾아오는 우연은 새로운 경험을 가져오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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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주어졌고, 심지어 다음 비행편까지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일에 슬퍼하기보다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이 옳다. 인생은 뭐 다른가. 사건은 발생했고, 임종까지의 시간은 한정되었다. 여행에서 우연을 즐거이 받아들이듯 일상에서도 변수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이 마음가짐이 호주인들의 그 대수롭지 않음에 한몫하지 않을까. 결항되어 새로 편성된 비행기가 마침내 이륙하자 기내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래, 이건 결항도 지연도 아니다. 한 여행이 끝났고, 이제 막 새로운 여행이 시작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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