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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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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한국영화사에서 굉장히 의미있는 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대중문화 정책으로 인해 그간 들여오지 못했던 유수의 일본 영화들을 들여오기 시작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 첫 시작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1997년작 영화 <하나비>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직접 주연으로 열연을 펼치며, 감독과 편집까지 도맡아 한 작품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이라는 쾌거를 안기도 했다. 투비트라는 만담 콤비로 첫 연예게에 발을 디딘 그가 영화라는 분야로 그것도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았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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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는 ‘니시’라는 형사를 페르소나로 내세워 그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작품 속 그의 아내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동료 형사는 총에 맞아 불구가 되어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된다. 비극적인 상황의 연속에서 ‘니시’는 동료들을 도우면서 아내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는데, 이를 계기로 계속해서 빚독촉에 시달려온다. 결국 그는 지긋지긋한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겠다는 마음으로, 경찰 복장을 한 채 은행을 털어버린다.

 

그 후 그는 아내와 함께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고, 그런 그를 야쿠자와 전 동료들이 추적해온다. 야쿠자들이 올 때마다 그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고, 마침내 마지막에 그와 그의 아내가 있는 해변에 전 동료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두발의 총성이 울리고는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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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의 오프닝 속 그림

 

 

무언가에 빠져든다는 것은 순식간이다. 내가 이 영화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3분 남짓한 오프닝 장면 때문이다. <하나비>의 오프닝에서 7살 정도 되는 어린 아이가 그린 듯 한 추상적이고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림, 그리고 서정성이 짙게 밴 듯한 피아노 선율은 너무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자체가 무언가 출처를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애상감이 드는, 지나온 어느 한 순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후 엔딩에서 ‘니시’가 아내와 같이 자살을 택하는 장면은 오프닝과는 또 다른 충격을 준다. 마치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이제는 삶에 더 이상 어떠한 미련도 남아있지 않아 보이는 100살 노인의 권태와 피로가 느껴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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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의 엔딩신

 

 

영화의 마지막 엔딩, 그 총성이 들리고 황량한 해변의 풍경을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비추기 전 니시의 동료 형사는 그를 보며 멀리서 나지막히 말한다.

 

'나는 저런 인생을 살 수 없을 거야.' 이 말은 영화 속 주인공 '니시'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감독 기타노 다케시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쓴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다케시’는 사실 영화감독, 영화배우 이전에 만담가였다. ‘투비트’라는 콤비를 결성해 만담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뒤, 인기를 얻어 본격적으로 배우로 연예계에 입문했고 그 뒤 우연한 계기로 <그 남자, 흉폭하다>라는 영화의 감독으로서 데뷔하게 된다. 그 뒤 <하나비>와 더불어 그의 최고작이라고 평가받는 <소나티네>를 발표해 유럽에서 그의 명성을 입증했지만,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얼굴 전체가 일그러져 모두가 그의 재기를 예상치 못했지만, 그는 보란 듯이 <키즈 리턴>을 발표하며 감독으로서 재기하고, 이후 <하나비>라는 영화를 통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타게 된다. 책에 언급된 그의 인생을 최대한 압축적으로 써내려 갔으나, 실제 그 의 인생은 이 함축된 말들 이상으로 훨씬 더 파란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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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의 한 장면

 

 

그의 팬이 되어 그의 인생이 담긴 책을 보고 다시 영화를 감상해보니, 이전에는 보지 못했 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 아니 그의 인생은 오토바이 사고 전후로 나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사고 이전에 죽음에 대한 일종의 동경같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나티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죽는 걸 너무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져.”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문장이지만 너무도 두려워하는 대상에 대한 환멸과 권태로 인해 그 굴레를 다소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끊고 싶었던 충동을 느껴본 자라면 이 대사가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오토바이 사고 이후 그가 낸 작품들을 보면 이제는 전혀 그런 묘사가 나와 있지 않다. 오히려 희망찬 분위기가 풍긴다. 그의 영화에 감돌았던 암울한 분위기는 계속해서 유지되지만 대사들에서 이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옅은 희망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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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티네>의 한 장면

 

 

대표적으로, 그가 사고 직후에 낸 다음 작품인 <키즈 리턴> 마지막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이제 끝난걸까?”라고 묻는 주인공 ‘신지’의 말에, 그의 친구 ‘마사루’는 “바보, 아직 시작도 안했어.”라고 답한다. 나는 여기서 이 말이 감독 스스로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사고 이후, 다 끝났다고 생각한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 작품으로 재기한 그 자신에게 투영할 수 있는 말이라고 느껴진 것이다. 또한 그는 만담가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 하나를 만들기 위해 몇만명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 말에서 그가 치열한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악착 같이 버텨냈는지 알 수 있다. 위태롭게 굴곡진 인생에서도 감독으로서의 삶에 언제나 충실했 던 ‘다케시’를 보면 경외심이 느껴질 정도다. 다만, 그를 마냥 동경하고 존경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는 수차례의 불륜을 저질렀고, 음주운전, 그리고 수많은 혐한적 발언을 한 인물이다. 감독으로서의 삶에는 충실했으나,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비판받아 마땅한 인물이 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보면 작품은 작품으로만 보고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무척이나 아름답고 따스한 장면들에 영화가 상영되는 그 시간 동안만큼은 영화에 온전히 마음이 빼앗겨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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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즈 리턴>의 한 장면

 

 

기타도 다케시. 1980~90년대 일본 영화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그는 2017년에 냈던 작품 <아웃레이지 파이널> 이후로 2023년에 <목>, 그리고 2024년에 <브로큰 레이지>라는 작품으로 또 다시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아직 국내에는 개봉하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3대 영화제인 칸,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에 초청된 이 작품들로 그가 아직 영화 감독으로 여전히 건재함을 여실히 증명해낸다.

 

영화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분명 광휘처럼 휘몰아치는 순간들이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경우에는 아마 80~90년대가 그러할 것이다. 한 감독이 반짝였던 순간의 흔적을 목도하고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그의 영화를 사랑한 팬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설사 그로부터 바라왔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그 노년이 접어든 나이에도 계속해서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 백발의 노인에게서 여전히 열의에 찬 소년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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