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와다 요코의 신간 『태양제도』가 출간되었다. 『태양제도』는 다와다 요코의 '히루코(Hiruko)' 여행'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태양제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오늘은 시리즈의 시작인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국경과 언어를 넘나드는 이 여정은 히루코로부터 시작되었다. 히루코는 유럽에 유학을 온 사이 자기 나라가 사라졌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유랑민 신세가 되었고, 자신만의 언어 '판스카'를 만든다.
["나의 판스카는 실험실에서 만든 것이나 컴퓨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느낌에 따라 이야기하면서 저절로 발생해 통하게 된 언어다. ‘어떤 언어를 공부하자’고 정한 뒤 교과서로 그 언어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소리를 체취하고 이를 반복해 말하면서, 규칙성을 리듬으로 체감하여 목소리를 내는 동안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언어가 되어가는 것이다."] - 다와다 요코, 은행나무, 『지구에 아로새겨진』, 2022, 40쪽.
생각해 보면 언어라는 건 참 기묘한 존재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이런 언어가 또 수천 개나 존재한다. 태어난 나라, 살게 된 나라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고,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아무리 외국어를 배워도 그 나라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가 존재하고, 다른 나라에서 모국어를 쓰는 사람을 만났을 때 생기는 반가움이 있다.
히루코는 자신과 같은 모어를 구사하는 사람, 텐조를 만나기 위해 떠난다. 언어학자로서 히루코에게 매혹된 크누트와 크누트에게 이성적으로 매혹된 아카슈, 텐조의 전 애인 노라도 이 여정에 동참한다. 이들과 함께하지는 않지만, 크누트의 엄마 역시 텐조를 만나고 싶어 한다.
히루코는 왜 자신만의 언어, 판스카를 만들었을까. 판스카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상대방도 함께 판스카로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독특하다. 텐조가 사용하는 언어도 어딘가 어법에 맞지 않고 부자연스럽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히루코의 판스카와 유사한 면이 있다. 히루코는 외부로부터 강제로 상실된 아이덴티티를 되찾기 위해, 그 슬픔을 잊기 위해 판스카라는 언어를 만든 게 아닐까.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출신지와 구사하는 언어만 다양한 게 아니라 서로 간의 관계 역시 다양하고 독특하다. 히루코와 크누트, 아카슈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넘나드는 절묘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히루코와 크누트는 명백하게 서로에게 끌리지만, 섹슈얼한 끌림은 아니다. 성전환을 한 아카슈는 여성으로서 남성인 크누트에게 섹슈얼한 끌림을 느낀다. 노라와 나누크는 서로에게 강렬한 느낌을 준 애인 관계였으며, 히루코와 나누크는 언어를 통해 일정 부분 같은 아이덴티티를 공유한다. 크누트와 나누크는 크누트 엄마의 간섭을 받는 유사 형제 관계이고, 나누크가 스시 가게 일을 하며 알게 된 Susanoo는 히루코의 진짜 고향 사람이다.
시점에 따라 채워지고 정확하게 맞물리는 이야기를 읽고 있다 보면, 결국 소설 속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느껴진다. 성별도, 나이대도, 국적도, 사용하는 언어도 제각기 다른 이들은 외부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일부를 잃어버린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법(자신만의 언어 창조, 새로운 언어 습득, 성정체성 선택, 여행)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한다. 신선하고 독특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책이다. 3부작이 모두 출간되고, 이 책을 알게 된 당신의 행운을 축하하며.